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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새로운’ 프로테스트의 길을, 여러 종교들이 손잡고

이 글은 [경향신문]의 2017년 1월 7일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컬럼 원고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1062055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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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프로테스트의 길을, 여러 종교들이 손잡고

 

강남권 대형교회들에서 장로는 정치인, 고위급 관료와 법조인, 유력 교수, 대기업 CEO 등이 아니면 좀처럼 되기 힘들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국회의원이 된 이후 3년 넘게 일요일 주차관리를 하면서 교회 봉사활동에 힘썼는데 한번 실패하고 나서야 장로로 선출되었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한국개신교 신자들의 학력과 자산, 지위 등은 가톨릭과 함께 모든 종교 가운데 단연 높다. 그런데 가톨릭은 종교에 대한 충성도(집회참여와 기부금)에서 개신교보다 월등히 낮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 신자, 특히 엘리트 신자의 종교에 대한 귀속의식은 가톨릭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한데 이들 개신교 엘리트들은 대형교회에 집중되어 있고, 그들이 거기에서 장로 경쟁을 벌인다. 그만큼 대형교회의 장로는 한국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배층에 속한다. 그들은 많은 경우 교회를 매개로 하는 인맥 매커니즘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필경 이 매커니즘에서의 역할은 그들이 사회적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하는 데 중요한 자원으로 작용할 것이다. 요컨대 대형교회에서 장로가 된다는 것은 종교적 지위만이 아니라 (숨겨진) 사회적 지위이기도 하다.

하여 사회 각 부문에서 최상위로 갈수록 개신교 신자는 점점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이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개신교가 어떤 존재인지를 시사한다. 대형교회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거나 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교세가 한국의 종교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거나 하는 것보다 사실상 더 중요한 요소가 바로 개신교 엘리트가 사회의 핵심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부터 쓰나미처럼 거세게 밀려온 촛불의 행렬은 박근혜 정권의 부조리함과 부패에 대한 시민의 저항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 최고 수준인 불평등지수와 불행지수, 그리고 최악의 고용불안율과 산업재해율, 노동시간 등등, 세계에서 가장 삶의 질이 낮은 사회가 되게 한 지배층에 대한 사회적 탄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적 탄핵을 받아 마땅한 종교는 바로 개신교다. 특히 대형교회는 여기에서 제외될 수 없다.

2017년은 탄핵국면이 정리되어야 하는 해다. 대통령의 탄핵과 국정농단 세력의 처벌은 아마도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올해의 표어인 군주민수(君舟民水), 곧 통치자의 배는 국민의 촛불 쓰나미에 의해 전복될 것이다. 법이 하지 않으면 국민이 직접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좀 더 구조적인 대상에 대한 사회적 탄핵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긴 시간 동안 탄핵의 대상뿐 아니라 탄핵의 주역도 아프게 감내하면서 청산해야 할 것이다. 구조적인 것이기에 탄핵의 대상과 주역이 쉬이 떨어지지 않게 서로 유착된 탓이다. 또 미루면 어쩌면 오랫동안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이기에 힘들어도 뼈아픈 사회적 탄핵이 바로 올해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쩌면 개신교에게도 사회적 탄핵의 시간은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일지 모른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1517년 제국종교에 대한 프로테스트(protest)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회를 유럽인들은 잘 정리하지 못했다. 그들은 제국종교 대신 국민국가와 쌍을 이룬 국가종교(국가교회)를 탄생시켰는데, 권력과 종교의 야합, 아니 종교의 권력화는 모양만 달리 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국가종교는 비유럽 세계에 이식되었고, 교회들은 이 비유럽의 사회들에서 다른 유형의 권력의 카르텔을 만들어냈다. 한국의 개신교는 그런 권력 카르텔의 중심세력을 형성하면서 과잉성장해 왔다.

하여 그 500주년은 새로운 프로테스트를 도모해야 하는 계기가 되는 해여야 한다. 권력화된 교회와 교회 엘리트가 아닌 종교, 종교인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해다.

다행히도 개신교회들 가운데는 새로운 프로테스트의 길을 향해 이미 나선 교회들이 적지 않다.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교회당을 짓는 데 쓰지 않고 사회적 나눔의 경제를 확대하는 데 쓰며, 교인들의 봉사활동을 교회 내부 운영에 온통 투여하는 대신 사회적 섬김을 위해 투여하는 교회들이 이미 존재한다. 교인들의 종교에 대한 열정을 성소수자나 타종교를 적대하는 데 소비하는 대신 타자화된 존재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확대하기 위해 투여하는 교회들이다.

실은 그것은 개신교회 만의 현상은 아니다. 여러 종교들에도 그런 활동을 벌이는 주역들이 있다. 하여 새로운 프로테스트로의 길은, 타종교와 벽을 쌓는 대신 함께 손잡고 사회의 위기적 요소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어야 한다.

김진호_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