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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린디 일병과 포르노의 상상력

[서울신문] 2004년 6월 2일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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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디 일병과 포르노의 상상력




린디 잉글랜드 일병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이라크 전쟁포로 학대의 상징이 되었다. 전 세계인들은 드디어 미국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대상을 찾았다는 듯 린디를 향해 맘껏 저주하였고, 악을 응징하는 세계의 보안관으로 스스로를 기억하고 싶었던 미국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그녀에게 미국인들 또한 관대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 듯이 보였다. 이제 그녀는 포로학대의 혐의를 받고 있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하지만 이미 린디 텍스트는 법의 문제는 아니다. 다각도에서 해명되어야할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린디의 저 엽기적인 사진들이 ‘포르노적 텍스트’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그것이 그녀를 특별히 주목받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두 개의 텍스트를 떠올렸다. 

하나는 제시카 린치 일병의 텍스트다. 제시카와 린디의 텍스트를 비교하면, 이 둘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는 미 여군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은 각각 하나는 가냘프고 예쁜 이미지인 반면, 다른 하나는 강인하고 의지가 강한 모습이다. 하나는 적의 포로였고, 다른 하나는 적군 포로의 간수다. 또 그들은 각기 피해자와 가해자다. 그리하여 하나는 보호가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제거되어야 했다. 결국 착한여자 제시카는 영웅이 되었고, 린디는 ‘악녀’가 되었다. 

두 번째 텍스트는 〈나쁜 남자〉의 ‘조재현’이다. 여기서 조재현은 감독인 김기덕 자신과 상호교환 가능한 존재다. 린디는 포로학대는 상부의 직접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즉 그녀는 이 텍스트에서 연기자에 불과하다. 조재현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둘은 가해자의 연기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래서 둘은 각기 적극적인 악의 수행자이지만, 동시에 운명의 수동적인 희생자이기도 하다. 둘의 생존 방식은 자신이 가해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런데 〈나쁜 남자〉를 둘러싼 논란에서 조재현/김기덕은 악인으로 낙인찍히는 대신, “영화는 영화로 보라”며, 영화에 대한 찬사를 전제한 후광을 받았지만, 린디는 변명의 여지없는 악녀로 결정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포르노에 관한 가부장제적 시민사회의 질서를 몸의 일부로 체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호한 추억’을 본다. 가부장제적 시민사회에서 모든 남자는 포르노의 소비자다―실제적이든 잠재적이든. 내가 그것을 소비한다는 것은 내가 포르노 텍스트의 남자가 되는 상상에 빠진다는 것을 뜻한다. 포르노적 상상력에서 가해자는 거의 언제나 남자다. 결국 모든 소비자 남성은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한편 포르노 텍스트에서 여자는 희생자이고, 보호의 대상이다. 그래서 가부장제적 질서는 그녀를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을 최선의 시민사회적 공공성으로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가해자인 ‘나쁜 남자’를 응징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정의로운 얼굴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텍스트의 나쁜 남자의 욕망을 소비자인 모든 남성도 공유한다는 데 있다. 즉 ‘나쁜 남자’에 대한 시민사회적 응징은 동일한 욕망의 소유자인 자기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자신을 나쁜 남자와 구별하는 방안을 찾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서 포르노 텍스트는 종종 ‘나쁜 남자’를 변태이거나 범법자로 만든다. 혹은 <나쁜 남자>처럼 ‘그’의 번민과 성찰 과정 속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불편함이 해소되거나...

한데 린디 텍스트가 선사한 포르노적 상상력의 가해자는 뜻밖에도 ‘여자’다. 그리고 피해자는 남자, 남자이기는 하되 아랍인이라는 혐오스런 존재다. 보호해주고 싶은 여자가 아니라, 이제까지 ‘악’으로 표상되거나 최소한 ‘열등한 존재’로서 기억되었던 혐오스런 남자들이다. 그러니 아름답고 수동적인 여자에 관한 가학성의 텍스트와는 달리 이 독특한 포르노는 ‘역겹다.’ 따라서 이때 악녀는 역겨워하는 시민사회의 정상적 일원인 ‘우리’와는 애초부터 동일시될 수 없다. 또 여리고 수동적인 예쁜 존재가 아니라 강하고 적극적인 여자이기에, 보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두려운 존재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악녀’는 남성적 상상계의 거세공포증의 산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악녀는 탄생하였다. 결국 ‘악녀 린디’는 인류의 가학적 문명에 관한 성찰 대신 우리가 공범자로 가담되어 있는 포르노적 상상력만을 야기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