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2020년 03+04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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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신자’의 탄생
후발대형교회의 교회개혁담론의 맨얼굴에 대해 묻다
카리스마적 리더십
홍영기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설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펴낸 저서 《한국 초대형 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은, 조용기 용비어천가의 일종으로 평가할 여지가 많지만, 한국 초대형교회의 성공 요인을 명쾌하게 분석한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그가 분석한 초대형교회는 13개인데, 이들 교회들을 담임한 이들의 ‘카리스마 리더십’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요소임을 도출해냈다.
‘카리스마’(χαρισμα)라는 그리스어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신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재능’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이 용어를 사회학적 의미로 재해석해낸 막스 베버(Max Weber)의 용법에 의존하면서 초대형교회 목사들의 리더십을 해석한다. 즉 ‘카리스마’는 교회에서 잘 짜인 신뢰의 체계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것이 신자들의 결속력을 증진시키고 교회 성장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는 것은 교회의 가용자원에 대한 독점적 지배능력이다. 그러한 리더십의 담임목사가 교회의 가용자원을 성장에 집중 투여하여 교세 팽창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초대형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초대형교회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이런 성공 시나리오는 한국의 대형교회 전반에 대한 해석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거의 모든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각 교회들마다 여러 성장 요인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요인들의 공통분모에 카리스마적 담임목사의 존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소형 교회들 중에도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돋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홍영기의 가설은 제한적이다. 실은 그는 자신의 책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담임목사들 모두가 성장지상주의자는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다른 것에 자원을 동원한 이들도 적지 않다.또 다른 경우도 있다. 그들이 성장을 추구함에도 예기치 않은 성장 저해 요소들을 만나서 그 성장 기조가 꺾여버린 경우다. 가령, 담임목사의 권력남용이 문제가 되어 갈등이 발생했거나, 다른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이와 교회 안에서 갈등을 거듭하다 교회가 분열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성장 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주장한 홍영기의 가설은 보완이 필요하다. 자신의 가설에 부합하는 사례들만을 분석하여 도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경우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성장은 깊은 상관성이 있다.
그런데 베버는 카리스마적 권력은 장기간 그 효과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에 권력의 내용과 형식이 변형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베버는 두 경로를 주목하는데, 그 하나는 전통적 권위로 회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 권위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홍영기처럼 대형교회의 성공 스토리를 해석하는 데 활용할 경우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면 많은 대형교회들에서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장기간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담임목사로 재직하다 은퇴하게 되었을 때 혹은 은퇴 이후 한동안 ‘원로목사’ 직함을 가지고 사실상 담임목사직을 연장한 뒤에 혈통적 세습을 단행하게 될 때, 권력을 세습한 자녀 혹은 사위 등이 아버지나 장인이 만들어 놓은 권력독점적 체계에 의존하여 교회를 운용하게 되면 교회는 전통적 리더십으로 회귀하게 된다. 혹은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취임한 후임목사가 의사결정 과정의 합리성을 내포한 제도적 개혁에 성공할 경우 교회는 합리적 권위의 체제로 이행하게 된다. 아무튼 베버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개념을 활용한 홍영기의 대형교회 형성 가설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장기화’라는 점을 반영하는 보완적 해석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런 예는 교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북한이다. 3대째 권력의 혈통적 세습이 단행되고 있음에도, 그 체제를 운용하는 전통적 권위의 제도가 꽤 체계적으로 만들어졌고 제법 잘 운용되고 있음에도, 그 체제를 최고층위에서 구동하는 것은 최고통치자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박종현의 연구노트 쯤되는 글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82호, 2008.4)는 홍영기의 가설을 보완하는 글로 유효하다. 특히 그의 글 후반부에 간략히 제기된 논점이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197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임의로 17개 교회를 선정하여 담임목사의 재임 기간을 조사한 결과 모든 교회가 그 이전에는 담임목사의 순환이 잦았던 데 반해 그 이후에는 장기간 재직하는 양상이 예외없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여 그가 내리는 결론은 1970년 이후에는 담임목사의 임기가 장기화되면서 리더십의 집중화가 나타났고, 그것이 교회의 양적 성공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연구노트 수준의 글이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이 연구는 양적 연구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 1970년 당시 한국개신교 교회수가, 한국종교사회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12,866개소인데, 그가 조사를 위해 선정한 교회는 17개소로 전체의 0.001%에 불과하여, 교회의 전체 추세를 해석하는 데 활용하려면 표본 추출에 있어 좀더 섬세한 장치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박종현은 17개 교회를 ‘임의’로 선정했다고 진술하였는데, 그것은 필시 이런 ‘장치의 결여’를 염두에 둔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분석한 결과를 보면, 불리한 표본을 ‘작위적으로 뺀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냐면 1970년 이후에도 목사의 재직 기간이 길지 않은 경우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택한 교회는 공교롭게도 예외 없이 1970년을 전후로 재직 기간의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증적 논거를 어설프게 서술했지만, 그의 해석은 충분한 논리적 개연성이 있다. 즉 ‘임기가 장기화’와 ‘리더십의 (권력) 집중화’가 서로 강한 인과성을 갖는다는 것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또 그 시기에 교회의 성장률이 가파르게 차고 올라갔고, 그중 대형교회로 부상한 교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목사들의 재직 기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임기의 장기화와 권력 집중화가 교회의 양적 성공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그가 분기점으로 선정한 ‘1970년’은, 그 전 해인 1969년에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여 ‘3선 개헌’을 시도한 직후다. 당시 교회와 정부가 서로 친화적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권위주의적 성향의, 즉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추구했던 많은 목사들이 대통령처럼 ‘임기의 장기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목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불문율의 하나가 있다. 한 교회에서 사역을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하든 그 교회 근처에서 살지도 말고 그 근처로 돌아다니지 말며 그 교회의 신자들도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역 기간이 충분히 길지 않음으로써 목회자 교체가 빈번한 상황을 전제로 하여 회자되는 금언(?)이다. 그런데 일부 중・소형교회와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에선 이런 불문율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 교회들에선 담임목사가 적어도 20~40년간 교회의 절대적 권력자였고, 그 이후에도 은퇴목사로서 사실상의 지배력을 사망 때까지 유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일부 교회들에선 세습까지 단행함으로써 사역지였던 교회와 담임목사였던 이의 인적 연결고리를 물리적 한계 연령 너머까지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홍영기의 가설과 박종현의 보충가설을 연결시켜 해석하면,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장기간 일관되게 집중 투여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실현해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대형교회 탄생의 가장 일반적인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실은 이는 교회뿐 아니라 국가, 그리고 기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특히 1960~1990년 사이에 성장지상주의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결합은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신자’의 탄생
나는 여러 글들에서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대형교회의 등장이 개신교 교세의 증가와 더불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반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교세의 증가 추세는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조사결과도 볼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런 저성장 혹은 역성장 시기에도 대형교회가 된 교회들이 있다고 얘기했다. 이런 관점에서 대형교회의 유형을 둘로 나누었고, 그것을 각각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서 하나 더 확인할 것은, 선발대형교회 유형에서 양적 성장은 ‘새 신자들의 유입’의 결과인 반면, 후발대형교회 유형은 수평이동한 신자들의 재정착이 중요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그 연장선 상에서 논의를 펴고 있다.
1992년의 《기독교대연감》(이하 ‘연감’)에는 1991년의 한국개신교 인구가 1,200만 명이 조금 넘는 것으로 나온다. 또 2013년 한국목회자협의회(이하 ‘한목협’)가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구의 22.5%가 개신교 신자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 인구와 대비해서 보면, 대략 1,1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한데 200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전수조사된 개신교 인구는 18.3%로 860여만 명에 불과하다. 또한 이 조사에서 1995년과 2005년 사이 개신교 인구는 14만 명 이상 감소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개신교 단체들의 조사와 국가가 시행한 2005년 인구센서스의 조사 사이에 존재하는 3백만 명 안팎의 차이는 최소오차에 속한다.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 많은 연구자들이 여러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은 ‘중복교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연감’과 2005년 인구센서스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왜냐면 ‘연감’은 각 교단이 조사한 교회들의 통계를 취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이곳저곳 방문한 신자들을 교회 담당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신자로 등록시키려 하지만, 그럼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두 개 이상의 교적을 남기게 된다. 하여 신자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는 얘기다.
한편 ‘한목협’의 조사와 2005년 인구센서스의 차이에는 아마도 개신교 신자라는 것에 대한 다른 인식이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어야만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는 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지 않음에도 일요일에 어느 교회든 참여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됨에 있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들은 개신교회든 가톨릭교회든 예배에 참여하기만 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만이 아니라 불교 사찰이나 무속신앙에 대해 존경심을 표할 수 있고 심지어 특정 종교에 귀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며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 신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2015년 인구센서스에 기초해서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의 수가 최소 1~2백만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한데 다원주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최소 1~2백만 명에 달하는 데도 인구센서스를 포함한 종교인구 조사들은 단 한 가지 종교만을 선택하게 한다. 이는 여러 종교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는 이들이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인구센서스에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그것은 자신의 종교를 답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종교에 속한다고 하는 것이 제일 폼나는 대답일까, 혹은 어느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더 멋져 보일까, 그나마 제일 귀속의식이 더 높은 종교는 무엇일까, 어느 종교에 속할 때 내게 더 유리할까 등등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이런 태도는 신자가 모습이 아니라는 일부 종교인들의 편협한 주장 때문에 종교적 활동과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종교인 중에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가는 수평이동을 하는 이들이 적잖다. 2005년 인구센서스에는 이러한 사정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한목협’이나 ‘연감’과 크게 다른 결과를 나타낸 2005년 인구센서스에는 ‘신자됨’에 대한 최근의 여러 물음들이 신학적, 신앙적으로 정돈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한국개신교 신자들의 혼돈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통계를 단순 활용한 개신교계의 기관들의 조사결과 속에는 이런 혼돈이 누락되어 있다.)
다시 얘기를 앞으로 돌려서, 이 세 통계를 유념하면서 수평이동 신자들의 재정착과 후발대형교회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 좀더 살펴보자. 개신교는 1995년대 중반 경 새 신자의 유입이 현저히 줄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신자들 중 다수가 떠돌이 생활에 접어들고 있으며, 떠돌아다니던 신자들 중 적잖은 일부는 재정착의 욕망을 버리고 떠돌이성(wandering spirit)을 내재화한 신자됨의 길에 들어섰다. 그것은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이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데 그 위기의 시기에 대형교회로 성공한 교회들이 있다. 내가 명명한 후발대형교회 유형은 이런 교회들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유형의 교회들은 수평이동 신자들의 유입이 성공의 중요한 요소였다. 새 신자가 아니라 수평이동 신자의 유입이라는 요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타종교인 또는 비종교인에서 개신교 신자가 되는 이, 곧 ‘새 신자’는 교회를 잘 모르는 자이기 때문에 교회의 일방적인 훈육 대상이 된다. 더구나 그들은 대개 도시의 빈민층을 형성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민자들이다. 그러니 학력도 자산능력도 상징자본도 거의 없는 이들이다. 즉 그들은 종교적 자존성도 사회적 자존성도 매우 낮은 이들이다. 하여 그들 대부분은 교회에 신자로 유입될 때 목사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는 자들이었다. 홍영기가 말한 대형교회 성장에 중요한 요소가 된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유형의 교회들과 관련이 깊다. 나는 이 교회들을 선발대형교회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 유형에 속하는 교회들에서는 새 신자 양육 프로그램이 중요했다. 그런데 ‘중반 이후’에는 가정회복 프로그램이나 자기계발 프로그램 같은 가족과 사회생활을 위한 신앙적 주체형성 프로그램이 더 주목을 받는다. 이것은 새 신자보다 수평이동한 신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교회들이 더 많이 활용한 결과다.
이렇게 수평이동 현상이 더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선교 상황의 변화와 연관된다. 많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넓은 곳에 산개하여 살고 있으며 교통수단이 덜 발전하여 장거리 이동이 여의치 않은 사회는 ‘교구’(parish) 개념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에서 수평이동 현상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서울처럼 인구가 과잉 집중된 사회, 그리고 교통수단이 대단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일종의 종교시장의 상품처럼 전시되고 소비된다. 이때 디지털화된 콘텐츠가 무한 유통되는 정보사회의 매스미디어가 충분히 발달하면 선택될 상품의 가치는 더 다양화되고 세밀화되어 전시된다. 그러므로 수평이동 신자들은 교회들에 대해 더 많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러한 정보 능력은 사회적 지식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한다. 즉 1990년대 중반에 중요성이 부각된 신자의 수평이동 현상에서 이들 떠돌이 신자들 가운데는 (최근의 여러 연구들이 확인시켜 주듯이) 사회적 엘리트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자들을 더 많이 정착시킴으로써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물론 이 교회들에서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모든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이의 성장전략이 효과를 드러내려면 수동적인 새 신자를 훈육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주체적인 신자들을 위한 선택지를 확대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지배하고 통제하며 주도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아닌, 설득하는 리더십의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 시기에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만의 현상은 아니다. 신자들의 유출을 막아야 하는 교회들, 그리고 다른 수평이동 신자들을 유치하려는 교회들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성장전략을 강구해야 했다. 하여 이러한 상황은 신자들의 ‘주권’이 강화되는 상황과 겹쳐서 전개된다. 목사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신자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닌 신자들 자신의 신념과 기호에 부합하는 맞춤형 목회와 선교를 통해 신자의 유출을 방어하거나 떠돌이 신자를 유치하려는 경쟁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하여 그런 신자들의 신념이나 취향을 더 많이 반영할수록 교회의 내적 다이내미즘이 활성화된다. 나는 이런 현상을 ‘주권신자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 용어는 ‘주권시민’의 개념과 연관시키기 위해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즉 199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한국사회는 시민들의 주권이 급신장하였고 그것이 이후 사회 전개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여전함에도 그 이전과 이후는 중요한 제도와 담론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1990년대 중반 이전의 신자와 이후의 신자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가정 아래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교회제도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신학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더욱이 대형교회들의 경우는, 앞에서 보았듯이, 그 1인의 위상이 여전히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주권신자’는 제도에 있어서는 그 맹아적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표현을 굳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권신자들의 교회에서의 활동 영역은 제도가 보증하고 있지 않음에도 담론의 차원에서는 그 중요성이 점점 확장되고 있고, 때로는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의 종’들의 천민화
선교 초기부터 개신교는 많은 근대적 학교들을 만들었다. 이곳들은 전근대적 교육기관들에 비해서 신분과 성별의 차이가 훨씬 적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계 장로교는 다른 교단들을 압도했다. 또 이 시기 서북지역 출신의 미국 유학생들의 수는 다른 지역 유학생들보다 현저히 많았다. 1945년 이후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보유한 사회세력이 되었고, 교회의 엘리트가 된다는 것은 그 자원들에 대한 통제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이후 1990년대까지 목사들은 교회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유력한 엘리트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1960~1990년 사이 개신교 교세가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때에 많은 교단들은 편법을 쓰기 시작했다. 국가로부터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학교와 신학생들을 양산한 것이다. 이들은 교단 내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기에,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성장을 추구하곤 했다. 성공한 목회자들은 그가 문교부 인가 학력을 갖지 못했더라도 모두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 중 일부가 교회 성장을 주도하여 중・대형교회를 만들어냈다.
물론 높은 학력을 인정받는 신학대학 졸업자들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력이 어떻든지 간에 성장만을 위해 올인하던 많은 목회자들은 그만큼의 지성을 갖출 여유가 없었다. 한데 교회가 커갈수록 신자들 가운데 높은 학력을 보유한 이들이 많아졌고, 이는 ‘학력위조’에 대한 필요를 증가시켰다. 요컨대 1980년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많은 목회자들의 성장지상주의적 전략들은 점차로 목회자들에 대한 사회적 위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1990년대에 이르면 신학교의 위상은 급락한다. 성장이 둔화되면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권세력이 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과거만큼 크게 확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했다. 이것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근대적 학문의 공론장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키게 했다. 신학생들도, 교회 성장세의 급격한 둔화로 인해 취업시장이 얼어붙게 되자, 성장지상주의적 기능성 신학에 몰두했다. 그것은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이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진보적 성향의 지구적 신학시장 역할을 해왔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위상이 크게 둔화되면서 진보적 그리스도교의 국제적인 네트워크가 무력화되자 신학대학은 근본주의 일색의 교회에 완벽히 포위되어 버렸다.
교회 사역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중・소형교회의 많은 엘리트 신자들이 수평이동하여 몇몇 대형교회로 속속 옮겨가고 있었고, 새로운 신자의 유입은 거의 멈춰버렸다. 또 적잖은 이들이 다른 종교로 옮겨가거나 비종교인이 되었다. 교회 성장의 새로운 비법으로 유행하는 각종 프로그램들은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최소한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 형식을 따라하기는 하지만 큰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형교회들에선 효용성이 매우 낮았다. 하여 매년 1천 개 이상의 교회들이 사라져갔고, 생존하고 있는 교회들도 점점 상황은 악화되거나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이었다. 더구나 파행화된 신학교육으로 인해 신학적 소양이 매우 낮은 이들이 교회 사역자로 유입되었다. 악화된 선교환경을 해석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도시교회에서, 특히 서울의 교회들에서 목회자나 신학생은 가장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에 속한다. 게다가 살아남기 경쟁에 몰두한 나머지 품격도 천민화되었다. 신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은 목사들의 주요사역의 하나인 설교를 경청하지 않게 했다. 이는 목사에 대한 존경심의 붕괴를 의미했다. 하여 ‘주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던 목사들은 지적・영적 세계에서 ‘천민적 존재’로 추락했다.
‘증오의 정치’와 주권신자의 이반
최근 대외적으로 선교의 위기가 심화되고 대내적으로 존경심의 붕괴로 인한 지도력의 위기에 놓인 많은 목회자들을 결속시키는 개신교계의 기획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증오의 정치’의 활성화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위기를 직시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투사하여 그것을 증오하고 공격적 행위를 조직해내고 수행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 이단, 성소수자, 무슬림 등이 오늘날 교회에 의해 적으로 지목된 주요 표적들이다.
목사 등, 교회사역자들이 적을 향한 증오를 위해 극우주의 정당을 만들었다. 또 교회의 설교의 자리에서 무수한 증오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들은 정당을 만들 만한, 그리고 엘리트신자들을 설득할 만한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 더욱이 약한 논리를 포장할, 존경의 위상도 거의 무너졌다. 하여 많은 신자들은 교회를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남아있더라도 목사들의 정치에 동조하기를 그만 하였다. 그리고 차차 독자적인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진보적 행동주의 단체에 동조하는 활동을 개시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다른 보수적 행동’을 시작했다. 그중에는 수평이동 신자들이 재정착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교회의 문화였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들은 이렇게 대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할 교회 현상이 하나 더 생겨난 것이다. 극우주의적 현상과 관련이 깊은 선발대형교회 유형 외에, 후발대형교회 현상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사회의 파워엘리트가 교회의 ‘주권신자’로 부상하여 교회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는 담론적 주체가 되었다. 여전히 제도적 차원에서는 담임목사가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실제에서는 ‘주권신자’들의 신념과 기호를 충실히 반영하는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성공한 목회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많은 교회들에서 ‘주권신자’의 범위를 둘러싼 갈등이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다. 파워엘리트가 주도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모든 신자의 범위로 확장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된 교회가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방식의 주권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르케의 정치’(초인정치, 엘리트정치)와 데모스의 정치(시민정치)를 둘러싼 고대 지중해 지역의 계급갈등과 유사하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무게 축이 이동하든, 여기서 고려되지 않은 것이 있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담론적 갈등 속에 그들의 외부, 즉 ‘주권 밖으로 내몰린 대중’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주의가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바깥에 대한 성찰이 없는 보수주의’가 ‘주권신자’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교회개혁담론의 맨얼굴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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