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울림](2020 04)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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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아리마태아에 관한 발칙한 상상
메시아 부활 이야기는 이렇게 퍼져나갔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가장 중요한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데 느닷없이 복음서 끝부분에서 서너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에 관한 이야기에서다. 그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른 이들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어떤 예수 이야기에서도 거의 언급된 적이 없던 이들이다. 근데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이름이 열거될 때 항상 한 명의 여성이 예외 없이 제일 앞에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 바로 그녀다. 해서 일부 성서학계에서는 주장한다.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는 여성 제자들이 포함되었고 그들의 리더는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말했듯이 이제까지 예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 텍스트 속에서 그녀들, 그리고 그이들의 리더인 막달라 마리아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 처형 사건과 부활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에서 남성 제자들은 보이지 않고 여성 제자들만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이끈 이는 막달라 마리아다.
이 글은 바로 이 사실을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이 여성 제자들이 그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텍스트에서 흥미롭게도 한 명의 남성이 등장한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Ἰωσηφ ὁ απο Αριμαθαιας)이라고 알려진 이다. 자신의 동굴무덤을 예수를 위해 공여한 사람이다. 그렇게 그는 이 대목에서 등장하고, 이후 사라져버렸다. 복음서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 제자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외전 중 라틴어로된 〈빌라도행전〉(Acta Pilati)에 첨부된 〈니고데모복음〉(Nikodemusevangelium)에는 그 사건 이후 그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의 빌미가 되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 그리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에 의해 감옥에 구금되었으나, 지진이 일어나 감옥을 탈출하여 고향 아리마태아로 돌아갔다고 한다.
서기 2~3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도교 변증가들은 그가 아리마태아로 간 뒤의 그의 행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히 ‘삼위일체’ 개념의 초석을 만든 이로 알려진 저명한 변증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서기 155~240년경)는 아리마태아 요셉이 영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최초의 전도자였다고 전한다. 서기 9세기 마인츠의 대주교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66-856)는 그의 영국 활동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즉 그는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세 남매 마르다・마리아・라자로 등과 함께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다시 아리마태아 요셉만이 영국으로 가서 영국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12세기 영국의 사회학자 맘스베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은 영국 선교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술하는데, 사도 빌립이 아리마태아 요셉을 포함한 열두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들이 영국 남서부의 소읍인 글라스턴베리(Glastonbury)에 수도원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은 거기에서 아리마태아 요셉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가설을 제시한 것이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로베르 드 보롱(Robert de Boron)은 당시 떠돌던 야사인 성배 이야기를 아리마태아 요셉과 연결시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펴는 시와 소설을 쓰는데, 이는 이후 성배에 관한 대중의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로베르 드 브롱에 의하면 로마병사가 십자가에서 사망한 예수의 배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철철 흘렀는데, 아리마태아 요셉이 그것을 잔에 담아 보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성배’(Holy Grail)인데, 그것의 신비한 힘 덕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성배를 자신 아들 요세푸스 편으로 영국으로 보냈고 그도 뒤따라갔다고 한다. 예언자이자 마법사인 멀린(Merlin)이 자신의 주군인 아서 왕(King Arthur)에게 성배에 관한 정보를 주고, 아서는 그것을 찾아내 성배를 전유함으로써 그의 권력이 강성해졌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복음서들에서 예수를 안장한 동굴무덤 이야기에만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어느 정전 텍스트에도 침묵하고 있는 그에 관한 이야기는 경외전과 교부들, 중세기의 학자들과 소설가 등에 의해 풍부한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다.
경외전과 교부들, 소설가들이 이야기한 아리마태아 요셉은 그 나름대로 흥미로운 연구 주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 사후에 예수운동이 전개되는 초기 과정에서 등장한 아리마태아 요셉에 집중하고자 한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누구?
아래 표는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아리마태아 요셉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네 복음서 모두 그를 ‘아리마태아’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아리마태아’ 앞에 예외 없이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απο)가 있다. 이는 아리마태아가 지명임을 뜻한다.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정보는 오직 〈루가복음〉뿐이다. 거기에서는 이곳을 ‘유대아의 고을’(πολεως των Ιουδαιων)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즉 그는 유대아 지방의 한 시골마을 출신의 인사다.
한편 〈마가복음〉과 〈루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공의회 의원(βουλευτης)이다. 공의회를 뜻하는 불레(Βουλη)는 단어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마태복음〉에서 그를 ‘부자’라고 말하고 있고, 네 복음서 모두 동굴을 파서 자신의 무덤을 만든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유대아 지역에서 대단히 부유하고 지체 높은 인사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속한 ‘불레’는 예루살렘의 원로원인 산헤드린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네 복음서는 모두 그가 빌라도를 접견하여 예수의 시신을 자신의 무덤에 안장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로마제국 황제가 파견한 유대아-사마리아-이두매아 지역의 최고통치자를 독대하여 청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속한 불레가 최고 위상의 공의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복음〉의 ‘부자’라고 표현은, 그의 재산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분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부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그가 제사장이 아닌 유력층이라는 말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그렇다면 그는 평신도 장로 혹은 율법학자 쯤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면 그의 연배가 젊지 않다는 것을 시사할 테니, 장로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정리하면 그는 유대아에 속한 시골마을 아리마태아 출신의 산헤드린의회 의원이고, 당시 유대아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인사로, 평신도인 장로였을 것이다.
십자가형
고대로마제국의 극형법인 십자가형(Crucifixion)은 어떤 확정된 집행 절차를 갖추고 있지는 않다. 다만 가장 잔혹하게 죽게 하는 것이 목적인 처형 방법으로, 대략 처형 전에 채찍형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채찍은 가죽을 땋아서 만들었다. 여러 겹 땋을수록 채찍은 신체에 닿을 때 더 심한 찰과상을 입히게 되는데, 아마도 십자가형에 처형될 극형대상자에게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게 목적이므로 최대한 많은 가죽 가닥을 땋아 만든 채찍을 사용했을 것이다. 채찍의 끝부분에는 작은 쇳덩이가 묶여 있어, 채찍으로 내려칠 때 단단하지 않은 뼈를 탈골시키곤 한다. 다른 가닥의 끝부분에는 새가슴뼈나 나무가시 등, 날카로운 재질을 묶어놓아 수형자의 살점을 무자비하게 뜯어놓았다.
네 복음서에서 예수는 모두 채찍질이 수반된 십자가형에 처해졌음을 말하고 있는데, 몇 번의 째찍질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가장 잔혹한 채찍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너덜너덜해졌으며 몸 곳곳에 근육이 찢어지고 혈관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예수는 십자가의 가로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갔다. 대개 채찍형을 당한 수형자는 그냥 걷는 것도 어려운데 가로대를 짊어지고 가는 건 거의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서 병사들은 순례객으로 예루살렘에 온 ‘키레네(Cyrene) 사람 시몬’이라는 이에게 대신 가로대를 짊어지고 가게 했다. 〈마가복음〉 15,21에 의하면 시몬은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와 함께 거명되고 있다. 한데 〈마가복음〉을 참조해서 이 이야기를 기술한 〈마태복음〉과 〈루가복음〉에 알렉산더와 루포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 두 사람들은 〈마가복음〉 공동체에서만 알려진 사람이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예수는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혔다. 15센치미터쯤 되는 대못으로 발과 손에 못을 박아 성인남자의 몸을 지탱하는 것은 많은 기술이 필요한 일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매달린 이가 몸을 움직이지 않을 리 없으니, 형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손과 발은 점점 더 심하게 찢겨갔을 것이고, 겨드랑이 뼈는 탈골되고 근육은 심하게 파열되어 버렸을 것이다. 채찍질에 찢긴 부위와 못 박힌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뜨거운 날씨는 찢긴 살갗이 괴사되고 있었을 것이다. 썩어가는 몸으로 새들이 날아와 눈알을 파먹고 살점을 뜯어갔다. 그렇게 십자가형 수형자의 온몸은 그야말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다. 그렇지만 더욱 잔인한 것은 그런 고통이 빠르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하루 종일 계속되고, 어떤 경우는 나흘간이나 살아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경우 아침 9시에 못 박힌 후 6시간 후인 오후 3시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6시간 동안 극한적 고통이 계속되었다는 것도 너무나 잔인한 일이지만 그나마 빠른 죽음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니 그곳은 환호와 야유로 가득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십자가형의 잔혹함은 그렇게 모두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속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천천히 죽어간다는 데 있다. 아마도 그 자리를 지켜보았던 예수의 지지자들도 예수만큼은 아니어도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해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들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예수의 최측근 제자들에 대해 그토록 분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잔인함은 죽은 시신을 유기시켜 동물의 밥이 되게 한다는 데 있다. 찢기고 부러지고 피로 얼룩진 몸덩이에 벌써 썩어가는 악취가 풍기는 가운데 그 형장 아무 곳으로 내던져진다. 그러면 썩은 살을 먹는 짐승들이 남은 살들을 갈가리 찢어 포식한다. 하여 그이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이들은 마지막까지도 그를 위해 애도를 표할 기회를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형이다. 예수는 그렇게 죽었다.
빌라도에게 청원하다
예수가 사망했다고 직감한 순간 아리마태아 요셉은 빌라도에게 달려갔다. 빌라도와 접견하게 된 때를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날이 저물었을 때’라고 한다. 두 복음서 모두 세세하게는 다소 다른 표현으로 쓰지만 ‘옵시아스 게노메네스’(οψιας γενομενης)라는 두 그리스어 낱말이 함께 사용되는데, 그 뜻은 ‘저녁이 왔다’(evening approach)이다. ‘저녁’을 의미하는 ‘옵시아스’는 보통 6시 이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수가 사망한 시간이 세 시라고 한다면 그 후 최소한 세 시간이 지나서 빌라도와의 접견이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 예수의 시신은 이미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요셉이 산헤드린 의원이 아니었다면 빌라도를 접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겠다. 하지만 아무런 예약도 없는 방문이니 면접이 거절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요셉은 빌라도에게 극형으로 처형된 자의 시신을 자신이 거두겠다고 청원하고 있다. 빌라도가 그 청원을 수락하는 일은 자신이 언도한 실형이 무리한 것이었음을을 자인하는 셈이 되는 허락될 리는 마무다. 태형도 아니고 감치형도 아닌,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죄인에게나 내리는 최고의 극형으로 처결한 자인데, 이 예민한 형사재판을 내린 이가 하루 만에 처결된 자의 시신을 명예롭게 하겠다는 요구를 받아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다.
그만큼 요셉에게는 부담이 큰 청원이다. 어쩌면 목숨을 걸고서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최고위층 인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구나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황제의 행정관 빌라도 치하에서 고위층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대단히 신중한 처신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살아남는 일을 어느 정도 상상할 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요한복음〉 저자는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19,38)고 말한다. 이는 요셉이, 예수의 비밀제자단의 일원이든 아니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대한 절제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임을 적절하게 간파한 해석이다. 요셉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고 극한적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던 또 한 명의 예수 지지자였다. 신의 사도일지도 모르는 저이가 저렇게 비참하게 죽임당하고 있는 것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그이가 정말로 신이 사도인지, 그렇다면 신이 저렇게 자신의 사신을 내버려 둔다는 게 있을 수 있는가, 의심이 솟아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저이가 저렇게 죽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은 이런 일에 나설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몸조심하는 일이 그에겐 가장 익숙한 태도였다. 해서 그는 신이 당장이라도 저이를 풀어주고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사역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오만 생각에 빠져있었다.
한데 6시간 만에 그이가 숨졌다. 어쩌면 이 예상치 못한 빠른 죽음 앞에 그의 모든 판단력의 동요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둘러 성전 옆 안토니아스 요새로 향했다.
빌라도는 산헤드린 원로원 의원인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바로 접견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 듯 싶다. 요셉이 빌라도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때는 사망 시각 바로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이런 충동적인 행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골고다 언덕에서 안토니아스 요새까지는 한 시간이면 족히 도달할 거리다. 더구나 이런 충동적인 행보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게 했을 것이다. 한데 접견이 이루어진 시간은 6시간이 지난 뒤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다른 업무를 하고 있었든 아니든, 바로 요셉과 만나준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드디어 그들은 만났다. 말했듯이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자신이 거둘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원한다. 또 말했듯이 그 청원을 허락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빌라도가 허락했다. 아리마태아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 빌라도가 큰 부채의식이 있거나 그의 고결한 인품에 평소 깊은 호감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아무튼 요셉의 청원이 충동적이듯 빌라도의 허락도 충동적인 것이었겠다. 그래야만 이 이상한 일을 설명할 수 있다.
동굴무덤에 안장하다
요셉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만든 동굴무덤에 그를 안장했다. 부러지고 찢기고 피투성이가 된, 그리고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흔적 등을 수습해서, 시신의 부패를 지연시키는 몰약과 침향을 발랐다. 〈요한복음〉과 경외전인 〈니고데모 복음〉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요셉과 행동을 갖이 했다고 한다.
이미 여섯 시가 훌쩍 넘었으니 안식일에 들어섰다. 빌라도가 허락한 것에 대해 대제사장과 다른 산헤드린 의원들이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안식일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십자가형을 안식일까지 이어가는 것이 불경한 일이니, 예수의 처형극을 서둘러 끝내려는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과정에서 예수는 완전한 사망에 이르지 않은 채 처형이 끝내졌을 수도 있다. 물론 처형과정을 수행하는 병사들과 관리들은 그것을 몰랐을 것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의 몸을 수습해서 서둘러 자신의 동굴무덤에 안장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났다.
시신이 사라지다―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하나의 상상
안식일 다음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여성제자들 몇이 동굴무덤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라도 예수의 몸에 예의를 다하려는 것이겠다. 한데 동굴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의 몸이 사라졌다. 근데 한 청년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말한다. ‘예수님이 부활했습니다.’ 해서 그녀들은 이 얘기를 퍼뜨렸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이상이 예수 부활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버전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 이야기의 대략적 내용이다.
한데 이 이야기에는 약간 의문이 생긴다. 동굴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돌로 무덤을 봉쇄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한데 여성 세 명이 무작정 그곳으로 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마도 빌라도는 요셉의 청원을 허락했지만 분명 단서를 달았을 것이다. 정치적 사건의 처형자의 시신이 유기되었을 경우 대중의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해서 이런 사건에서 시신을 누가 차지하는지는 항상 중요한 정치적 논쟁거리가 된다. 노련한 행정관 빌라도가 그것을 모를 리 없으니 요셉의 청원을 허락하면서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만반의 안전조치를 취해 두었을 것이겠다. 그렇다면 로마병사가 무덤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데 동굴무덤으로 가는 여성들이, 그것도 단 세 명이 무작정 그곳에 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병사들은 허락없이 방문한 여성들을 체포했을 것이고 어쩌면 돌아가며 윤간하는 만행을 자행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살해하고 땅에 뭍어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병사들이 사라졌고 동굴무덤이 열려있고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후속 이야기들을 생각한다면, 이 여성들의 이상한 행보는 요셉과 미리 약속된 행동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설명이 된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했던 9세기 마인즈의 대주교가 썼다는 아리마태아 요셉의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그것은 구술로 전해지는 어떤 이야기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는데,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이주하는 요셉 일행 속에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마리아・라자로 남매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진짜 함께 이주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들이 동료도 나온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베드로 등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대중설화는 요셉이 막달라 마리아 등과 모종의 연고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가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막달라 마리아 중심의 여성제자들이 남성제자들과 따로 움직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글 서두에 잠깐 언급했듯이 예수가 죽은 뒤 막달라 마리아 중심의 여성제자들만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뒤, 다른 복음서들과 〈마가복음〉 확장판(16,9절 이하)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격하하거나 남성 제자들 중심의 부활 이야기로 개편하고 있다. 여성제자들은 남성제자들의 보조역할 정도로 그친다. 하지만 이러한 개작은 여성 제자단의 움직임이 독자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남성 제자단도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성과로 나타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진 젠더보수파들의 관점에서는 예성제자들이 주도한 사건이 너무나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있는 것에 문제를 느꼈을 수 있다. 해서 이야기 확장판을 만들 때 고의적으로 여성제자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를 폄훼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 등이 주도한 활동 속에 요셉이 연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셉은 자신의 동굴무덤 속에 예수를 안장해 달라고 청원하는 무모함은 처음부터 막달라 마리아 등의 계획 속에 일부였던 것은 아닐까. 혹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충동적 사건을 막달라 마리아가 새로운 계획과 연결시킨 것은 아닐까. 둘 다 근거가 빈약한 상상이지만, 두 가정 중 하나라고 추정하지 않는다면, 동굴무덤이 열려져 있고 지키는 병사들이 사라진 것, 그리고 한 청년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연결시켜 상상하는 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여 나는 요셉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동굴무덤에 안치된 예수의 시신을 탈취한 사건의 주범 중 하나였다고 추정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이와 연계된 또 다른 주범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여기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를 따르던 일단의 활동가들의 역할이 지대했을 것이다. 베드로 등 남자 제자들이 그 사건을 전유하기 전까지는 예수운동의 주도권은 이들 여성 제자들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태복음〉에는 그 이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것에 기반을 두고 상상한다면 당국은 이 사건의 전모를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훔쳐간 것’으로 결론 내렸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니고데모 복음〉처럼 산헤드린에 의해 그가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을 것임을 가정하는 것은 조금도 무리한 상상이 아니다. 이 복음서에는 성배로 인해 그가 극적으로 감옥을 벗어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았다고 하는데, 십자가형을 처형당한 극형범을 동굴무덤에 안치되게끔 함으로써 그 판결의 정당성을 스스로 파기한 꼴이 된 빌라도의 입장에서 그 사건이 극형범의 부활설로 이어졌으니 어떻게든 꼬리자르기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을 것인데, 이 경우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행정관인 자신의 허락 없이 시신을 함부로 자신의 무덤에 안치한 행동으로 요셉을 처벌했을 것이다. 요셉은 그렇게 감옥에 갇혔거나 처형되었겠다. 혹은 그런 것을 예상해서 야반도주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가 마르세유로 이주했다는 후대의 설화는 그가 도주했다는 것에서 발전된 설화일 수도 있다.
한편 남성 제자들 중심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기억 전유 과정에서 아리마태아 요셉에 관한 더 많은 기억들이 공적 기억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는 살아남았고, 그것이 훗날 여러 야사 속에 그가 남겨진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리마태아 요셉은 막달라 마리아와 연계시켜서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정해보면, 그들은 예수가 처형됨으로써 와해될 뻔했던 예수운동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예수운동의 흐름을 계속 주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알 씨앗이 죽어 없어짐으로써 무수한 열매를 맺듯이, 그녀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정전 텍스트의 기억록에서 사라졌어도 그들의 열매는 예수운동 부활의 성과로 나타났다. 그렇게 예수운동은 되살아났고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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