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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콜라주된 성서를 콜라주하기 -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의 의의를 말하다

김경호 목사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 9권이 완간된 것을 기념하는 출판기념회가 6022년 6월16일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열렸다. 축사를 이만열 교수께서 했고, 서평을 김원배 박사님과 내가 맡았다. 

2007년에 첫 권을 시작한 이후 15년만에 9권이 완간되었다. 대단한 일이다. 그날 나의 서평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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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주된 성서를 콜라주하기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의 의의를 말하다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 각인되지 못한 새 시대의 징후

 

1980년대 중반경, 진보적 개신교계 청년활동가들은 민중신학에 열광하고 있었다. 보수적, 아니 수구적 극우주의와 단단히 결합된 신앙담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당시 진보적 청년들을 사로잡고 했던 사회변혁에 대한 상상을 신앙적으로 구현하는 언어를 발견하고자 하는 갈망도 민중신학을 환호하는 이유였다. 그런 갈망에 답하려는 민중신학의 경향을 민중신학 제2세대라고 불렀다.(이하 2세대’)

2세대텍스트들의 독서는 주로 활동가기구들의 하부단위 구석구석에서 공동학습을 통해 수행되었다. ‘조직적 독서가 이 텍스트들의 주된 독서양식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런 조직적 독서는 주로 공동학습을 이끄는 중간범주 행위자들을 필요로 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들을 이론운동가라고 명명한 바 있다. 한데 이론운동가의 역할은 공동학습의 이끄미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도 텍스트의 생산자였다. 그들의 텍스트는 2세대적 담론을 번안한 공동학습용 교재였다.

거의 모든 진보적 개신교계 활동가기구들이 앞다투어 공동학습용 교재를 만들어냈다. 각 교재들마다 꽤 많은 부수가 팔렸다. 이 책들이 읽히는 주요 방식은 조직적 독서였다. ‘2세대텍스트들과 이 교재들을 함께 읽고 공부하는 공동학습 현장은 열기가 넘쳤다.

그런 열기가 절정에 이를 무렵인 1988, ‘2세대텍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발원지라고 할 수 있던 한국신학연구소도 공동학습교재를 만들기로 했다. 네 명의 이론운동가들이 섭외되었고, 그들에 의해 2년여의 공동집필과정을 거쳐서 두 권의 성서교재가 탄생했다. 함께 읽는 구약성서(1991)함께 읽는 신약성서(1992)가 그것이다.

그 내막은 이렇다. 안병무 선생이 역사와 증언이라는 문고판 성서해설서를 쓴 해는 1972년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2, 선생의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힌 책인 역사와 해석이 발행되었다. 역사와 증언의 개정증보판으로 저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다 되어갈 무렵 한 독자가 새로운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또 한 번의 개정증보판을 부탁하며 소정의 출판지원금을 기부했다. 한데 당시 선생의 건강상태로는 글쓰기 자체가 불가능했다. 선생과 한국신학연구소 운영진은 기부자와 상의한 뒤 그것을 새로운 저자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 명의 집필자가 섭외되었고 3년에 걸친 밀도 있는 공동작업을 통해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두 권이 탄생했다. 역사와 해석이 명망 있는 신학자가 쓴 성서해설서라면, 이 책들은 활동가 대중의 현장에서 호흡을 맞추어왔던 무명의 이론운동가들이 쓴 성서해설서다. 이 집필자들의 사실상 리더 역할을 한 이가 당시 향린교회 부목사이던 김경호다.

이 책은 발행되자마자 종교 분야 최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이 탐독하는 스태디셀러이기도 했다. 한데 이 책은 공동학습교재로 기획제작된 것이지만, 그런 점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운명의 책이었다.

이 책이 발행되던 1990년대에 진보적 개신교계 활동가기구들은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다. 특히 하부단위 조직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궤멸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공동학습 현상은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책 제호의 함께 읽는은 공동학습용 저작이라는 메시지였지만, 공동학습 현상은 옛말이 되었다. 하여 책을 소비한 이들은 대부분 홀로 읽었다.’ 해서 세간에는 함께 읽는 성서가 아니라 혼자 읽는 성서라는 비아냥의 말이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이제까지의 모든 공동학습교재들의 판매고를 압도할 만큼의 책이 팔려나갔으니, 이 책의 성공은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독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신호였다. 물론 안타깝게도 당시 그들은 그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여전히 예전의 독서양식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데 주목하고 있었다.

 

결핍을 상상하다, 대화적 신학담론을 찾아서

 

책을 마무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집필진끼리 자축의 자리를 가졌다. 한데 자축 모임답지 않게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함께 했던 3년의 시간이 만든 인연을 이제 끝내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또 다른 책을 만드는 연구집단을 만들어 관계의 밀도를 더 체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원도 없고 안정된 일자리도 변변치 않던 이들이 감당하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서 같이 공부하고 방담 나누는 모임을 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마침 비슷한 취지의 모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개신교계의 여러 공동학습교재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저자들, 그러니까 나의 용어로는 이론운동가였으나 시대가 변하면서 사실상 용도폐기되고 있던 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생각을 점검해보는 모임을 만든 것이다. 이 모임의 결성을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집필자들 일부가 주도했고, 다른 집필자들도 곧 합류했다. 그들은 모두 2세대의 후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서른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해서 그들은 이 모임을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자축 모임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많았다. 특히 공동합습교재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했다. 마치 자신들이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청년운동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들은 대화의 실패가 문제라고 진단했다. 저자와 독자의 대화 말이다. 사실 이런 진단은 저자뿐 아니라 이 책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많은 이들이 제기한 것이기도 했다. 현장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기에 공동학습용 교재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사실 이런 진단은 설득력이 있다. 집필자들은 새로운 눈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에 주력했다.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비평방법을 활용한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야기하려 최선을 다했다. 이것만으로도 저자들에게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책은 독자가 읽는 것이다. 애초에 예상했던 그 독자는 익명의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성격의 활동가집단이었다. 이런 그룹은 공부 내용도 중요하지만 공부 과정에서 그룹 역동성이 강화되는 체험이 필요하다. 이것은 책의 내용상의 실험을 최대화하기 어려운 요소다. 왜냐면 그룹의 리더가 내용을 잘 숙지하고 그것을 공동체의 역동성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서 적당히 익숙하고 적당히 새로워야 한다. 한데 이 책은 조금 더 과하게 실험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별도의 리더십 프로그램을 통하지 않으면 학습 현장에서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허덕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하부조직들이 궤멸적 위기에 있었기 때문에 리더십 프로그램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화의 실패라는 진단은 독자와 독서 양식의 전환기라는 양상과 연결해서 해독할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당시에는 이것을 해독하지 못했지만 이후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을 통해 대화를 계속하면서 어렴풋이 문제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독서는 이제 공동체를 매개로 하지 않고 수행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즉 독자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각자 생각의 주체로서 책을 해독했다. 해서 저자는 독자에게 정보를 주는 이가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대화하자고 말을 거는 이가 되어야 했다. 이때 책을 선별하는 독자들의 취향은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처럼 새로운 해석에 방점이 있는 책은, 전통적 개신교의 신앙담론에 대해 급진적인 해체를 상상하는 이들에게 좀더 재밌는 책이 될 수 있었다. 또 새로운 정보나 비평방법을 공부하고 싶은 이에게도 흥미로운 책일 수 있었다. 그 시대는 기독교 신앙에 호감이 있었다가 실망감을 안고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변두리에서 비판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던 이가 꽤 많았기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기획은 시장에서 성공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한데 독자와 독서양식의 변화는 다양성에 열렸다는 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독자는 이제 저자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자가 되고 있었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고 받아들이는 학생이 아니라 생각의 주체가 된 것이다. 한데 함께 읽는 시리즈는 그런 독자와 대화하는 데 중요한 장애가 있었다. 그것은 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새로움이라는 것이 너무 웅대하고 경직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서가 나쁜 권력에 대해서 순응적인 책으로 읽혀 왔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성서는 원래 변혁의 눈으로 쓰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한데 이것은 너무 웅대한 시선이다. 독자가 책을 읽는 현장과는 별로 접맥되지 않을 것 같은 추상적 말의 향연처럼 책이 군림하고 있을 때 독자는 생각의 주체로서 독서하기보다는 여전히 학생처럼 책을 배우려 한다. 이럴 때 대화는 경직되기 마련이다. 해서 함께 읽는 시리즈 저자들은 독자와 대화하기 위한 장치를 특별히 만들여내야 했다. 텍스트 내에서 웅대한 변혁의 시각과 일상의 비루함이 접맥되는 대화의 지점을 찾아내야 하고, 텍스트 외연에서 그런 대화가 가능한 미시공론장으로 저자 자신이 진입해 들어가야 한다.

전자는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이 공론을 통해 발견해 간 문제의식이었다. 모두 2세대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이들이었지만, ‘변혁이라는 웅대한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을 찾아 새로운 담론적 실험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2세대와는 구별되는, ‘3세대를 주장했다. ‘2세대가 교회의 전통적 진리를 기각하고 변혁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진리가 진정한 기독교의 본연임을 발견하려는 웅대한 진리 재구축의 실험에 방점이 있었다면, ‘3세대는 일상을 향한 신학의 탐험을 강조하는 담론이다. 그것을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용어인 문화정치학이라고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3세대가 추구했던 것은 고통의 메커니즘을 해독하는 데 있었다.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체험은 거대한 진리에 질식한 이들의 몸의 언어였다. 이때 진리는 아름다운 말로 가득하지만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전제군주의 폭력적 본성을 닮았다. 그런데 그것에 질식한 이들의 몸의 언어인 고통도 폭력적이긴 마찬가지다. 많은 경우 더 아래를 향해 대중은 폭력적 군주를 닮은 자가 되고 있었다. ‘3세대는 이런 고통의 위계체계에서 바닦을 주목했다. 한데 민중신학의 용어로 성령 사건은 그 제일 밑바닦의 신음과 제일 상위의 진리인 신이 만나는 사건을 의미했다. 그것을 표현하는 민중신학의 용어가 3시대(the 3rd era)였다. 하여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이 3세대적 담론을 발견해 가면서 자신의 모임을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라고 개칭했다.

한편 어떤 텍스트가 대화적이기 위해서는 저자들 자신이 미시공론장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흥미롭게도 함께 읽는 시리즈저자들은 각기 이 책을 쓰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은 실험적 교회의 담임사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교회를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대화를 나누는 미시공론장으로 활용했다.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 대화적 신학의 공동체를 실험하다

 

자신이 담임하는 작은교회를 표본 삼아 새롭게 불고 있는 일부 민중신학적 교회들에 대해 김경호 목사는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라고 표현했다. 흔히 사람들은 민중신학 하면 민중교회를 떠올린다. 하지만 또 다른 민중신학적 교회가 있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유형의 교회는 많은 점에서 서로 닮았다. 하지만 민중신학을 교회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서 양자는 다소 강조점이 다르다. ‘민중교회는 민중신학 담론이 추구하는 상상적 주체(imaginary subject)를 교회 활동의 실제적 주체(real subject)로 삼고자 하는 열정의 산물이다. 반면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는 민중신학 담론을 소비하는 실제의 주역인 진보적 교양시민층이 민중의 으로서의 신앙을 추구하고자 하는 교회 현상이다. ‘민중교회가 민중 자신의 자기 채움을 추구하는 신앙제도를 발견하고자 했다면,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는 민중 친화적 교양시민층의 자기 비움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민중교회가 민중의 정체성의 정치의 산물이라면, ‘민중신학에 기반을 둔 교회타자성의 정치를 열망한다.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를 집필한 저자 중 세 명은 타자성의 정치를 지향하는 실험적 교회들의 담임 사역자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약속한 것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각자 자신의 현장에서 이 시리즈가 직면했던 한계를 돌파하는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많은 목사들은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새로운 성서 해석은 교회에서 활용하기엔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성서와 신에 대한 교회의 해석에서 너무 멀리 갔다는 얘기다. 한데 실험적 교회의 사역자가 된 저자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성서 해석을 유보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교회의 전통은 권력에 순응하는 제도와 담론으로 가득하다. 아니 교회 자체가 권력화의 산물이다. 한데 이들 저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면서 발견한 신앙은 그런 교회적 제도와 담론에 순응할 수 없다. 신 자신도 권력화되고 있었기에 신의 죽임당함이라는 실천이 필요했다. 권력화된 신의 철저한 자기 해체의 실천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요체다. 그러니 권력화된 교회와 신앙은 해체되어야 한다. 새로운 성서 해석이란 이렇게 권력에 오염된 성서의 신앙을 청산하는 정화운동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사람들의 일상과의 접점을 찾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성서 해석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위에서 지시하는 또 하나의 경직된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그들은 교회에서 그 접점을 찾는 실험에 돌입해야 했다.

그 방식은 대화였다. 이들의 교회들에선 각기 새로운 성서 해석의 텍스트를 매개로 하는 대화모임이 만들어졌다. 이전에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경우에는 그 텍스트를 집필자들끼리 검토하고 토론하면서 완성했다. 그것은, 말했듯이, 독자와의 대화의 실패로 귀결되었다. 반면 교회에서 시도된 대화모임은 처음 텍스트가 만들어질 때부터 대화의 장에서 독자의 검열을 받는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다. 교회를 찾아온 새로운 독자들과의 대화모임을 통해 텍스트는 2, 3... 검열 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어진다. 하여 그것은 대화적 개정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교회도 점점 대화적 교회로 성숙해간다. 교회는, 신의 하명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신과 동등하게 대화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고 이웃과 상생적 대화를 나누는 종교적 시민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교회라는 미시공론장에서 텍스트와 독자, 그리고 저자가 대화를 한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텍스트는, 마치 태아가 인간으로 성장해 가듯, 몸이 만들어지고 내장과 뼈가 생겨나며 생각을 하고 표현을 하는 존재로 자라나듯, 스스로 말을 하는 주체가 되어 간다. 텍스트 자신이 스스로 말을 하게 되는 것, 담론이 된 텍스트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담론으로서의 텍스트는, 더 이상 교회라는 미시공론장에 갇혀 있을 수 없다. 더 넓은 공론의 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텍스트가 책이 되는 순간이다.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세상과 만나다

 

김경호 목사, 그리고 강남향린교회와 들꽃향린교회 신자들이 함께 만든 책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교회들이 창립된 1993년과 2005년 이후 지금까지 이곳을 거친 거의 모든 교인이 대화모임에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교인들의 일상의 삶이 맞닥뜨렸다.

교인들의 비루한 일상은 세상 속에 죽음 같은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혹은 세상의 불의한 질서를 주목하면서 교인들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당혹스러운 현실이 더 잘 보이기도 했다. 성서를 공부하면서 삶과 세계를 보는 문제의식이 더 예리해지기도 했고, 자신과 세계를 직시하면서 성서를 보는 보다 깊은 안목이 생기기도 했다. 대표 저자인 김경호 목사는 성서 공부를 통해 교인들과 나눈 이런 생각들을 반영하고 재반영하는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9권짜리 성서 해설서다.

9권을 묶는 이름은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생명과 평화의 눈이 도대체 무엇일까. 알 듯 모를 듯, 익숙하면서도 딱히 그려지지 않는다. 너무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해서,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데도, 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표제의 진부함은 책의 내용이 클리셰(cliché)로 가득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다. 책은 전혀 진부하지 않았다. 마치 콜라주처럼 간간이 이질적인 것이 끼어들어 본래의 흐름과 어색하게 섞인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분석 중에 교리의 역사가 끼어들고, 지역에서 벌였던 교회의 실천이 불쑥 개입해 들어온다. 설교의 일부가 나타났다가 민중신학적 고전을 발췌한 텍스트가 훅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엮이고 교회와 사회가 섞인다. 하지만 그 엮임과 섞임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콜라주의 힘은 그 엮임과 섞임이 평평한 것처럼 재현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연구자들은 일관된 네러티브를 만들어내려는 강박을 갖는다. 해서 이질적인 것을 엮고 섞는 데 소극적이다. 간혹 그런 것들을 엮고 섞어낼 때도 마치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한데 이 교회의 9권 짜리 책은 오히려 거칠게, 이질적인 것을 별로 숨기지 않으려는 듯이 콜라주한다.

사실 성서가 그렇다. 이질적인 것이 거칠게 엮이고 섞여 있다. 성서 해석자는 바로 그 거친 경계 지점에서 해석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성서가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 의해 읽히고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의 하나는 그 문서가 콜라주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런 거친 경계지점에서 자기가 끼어드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 때 책 읽기는 지루하지 않게 된다. 내가 이 시리즈에서 진부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함께 읽는 성서 시리즈의 저자들이 겪었던 대화의 결여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저작 단계에서 기획된 것이기보다는 무수한 대화모임의 의도치 않은 효과일 것이다. 그것이 대화모임의 힘이다. 대화란 수다떨기다.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수다스럽게 말하기, 그것의 부자연스러운 엮임과 섞임이다. 해서 수다는 콜라주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하나의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을 끼워넣으면서 답을 찾아낸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은 그것은 함께 읽는 공론을 통해 발견된 답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제 그렇게 태어난 책은 서로 합의된 공동체인 교회의 으로 나갔다. 그 텍스트는 스스로 말하면서 약속되지 않은 공론의 장에서 말을 할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 담론의 효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