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에 연재하고 있는 '언텍트시대 한국기독교' 5회차 글이다. 이제 하나 남았다. 헤매고 있는 중이어서 지난 여름호에 내 생에 처음으로(?. 내 기억엔 그런데...) 원고를 펑크냈는데, 이번에도 힘들었지만 겨우겨우 넘겼다. [가톨릭평론] 2022년 가을호에 실렸다. 별거 아닌데도 모든 글이 '권리침해'를 받았다고 신고를 해서 4호까지 모두 글을 접속금지 처분당했다. 예측컨대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암튼 그래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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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5)
언택트 시대,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평행이론
1980년대 초 개신교계 진보적 청년운동 기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고 있었다. 그 갈등을 당사자들은 ‘아이(덴티)티 논쟁’이라고 불렀다.
정치적 사회참여를 강조하던 개신교계 청년활동가들 다수는 맑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불온문서들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던 맑스주의 관련 텍스트들을 맹렬히 공부했고 자신들의 정치행위의 이론적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나아가 신앙을 맑스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무장하고자 애썼고, 그럴수록 교회 지도자들과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결국 그들의 다수가 교회로부터 이탈했다.
한편 그리스도 신앙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맑스주의와 대화할 수는 있어도 맑스주의적으로 재해석된 신앙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신앙의 진정한 아이(덴티)티가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데 이것은 비기독교권 사회운동과의 연결망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교회를 더욱 견고한 보수주의의 아성이 되게 했다. 이런 사정은 개신교계 진보적 청년활동가들(‘아이티파’든 ‘새로운 아이티파’든)에겐 매우 좋지 않은 여건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했다. 더 이상 교회는 그들 활동의 베이스캠프가 될 수 없었다. 하여 진보적 정치활동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은 교회 밖에서 정치활동의 장을 찾아내야 했다.
2020년 어간, 여전히 개신교는 보수주의 일색이었다. 물론 1980년대 ‘아이(덴티)티 논쟁’과는 거의 연관이 없는 지형에서 새로운 이들이 사회참여를 주장하며 교회개혁을 열렬히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했다. 시민사회의 눈에 비친 교회는 보수, 아니 ‘수구꼴통’ 세력에 다름 아니었다. 근대 한국의 독특한 역사 속에서 ‘수구꼴통’이란 반공주의를 신주처럼 받드는 극우세력을 뜻한다.
그런데 실은 2천년대 이후 성공한 교회들은 극우반공주의에 과몰입되어 있던 과거의 교회와는 부분적으로는 겹치면서도 다른 행보를 취했다. 오히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미학, 곧 성공한 이들의 품격을 강조하는 신앙을 추구했다. ‘교회 밖’ 일터에서 그들은 성공주의의 화신으로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의 전사(warriors)였지만 서구사회에서 부르주아적 품격으로 자리잡은 똘레랑스를 실천에 옮기는 데는 극히 인색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그들은 사회적 인색함을 종교적 윤리로 대체하고자 했다. 즉 ‘사회윤리’는 빈약했지만 ‘교회윤리’에는 꽤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개신교의 극우반공 세력은 쇠락하고 있었다. 과거에 극우파로 분류됐던 교회들조차 한 발은 성공하고 있는 교회 모델을 모방하고 있었다. 이에 자신들의 노선을 지키고자 하는 개신교 분파들은 교회들의 이런 추세에 강한 반감을 표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와 같은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고, 그 평판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엘리트들과 목사들이 기회주의적 언행을 비판적으로 보았던 강경한 극우파 신자들은 교회 안의 불만세력으로 남아 있기도 했지만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안에 있든 밖으로 나갔든, 그들은 교회 밖에서 정치행위의 장을 발견하려 했다.
교회 밖 정치행위의 장에서 이들은 ‘광장’을 누비는 ‘태극기전사’가 되었고, ‘넷공간’(the net)에서 활약하는 ‘미디어전사’가 되었다. 전자는 남성노인이 많았고 후자는 남성청년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후자다. 그들이 이 연재의 큰 주제인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의 한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적폐가 된 개신교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은 대중의 새로운 공론장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천지개벽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터넷 기반 미디어(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 ‘정치적 대중’의 존재양식이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과거 20세기를 전후로 하는 시기엔 대중이 정치 변동의 주역이 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치적 대중’이 탄생한 것이다. 한데 그들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 사회가 더 민주적 사회가 될지 더 파시즘적 사회가 될지 여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대중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데 대중의 정치적 성격을 결정짓는 데 있어 (매스)미디어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활용하는지 여부가 중요해졌다. 이는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공론장이 일방향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대중은 담론의 소비자이지 생산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인터넷 기반의 ‘뉴미디어’적 공론장에선 커뮤니케이션의 쌍방향성이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대중은 소비자만이 아니라 생산자이자 기획자가 된 것이다. 물론 인터넷 시대 초기에 뉴미디어는 주류 미디어가 생산한 텍스트를 마치 모세혈관처럼 미시공간 구석구석으로 퍼나르는 역할을 했다. (매스)미디어 일색이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확산 범위가 넓고 깊어졌다. 또 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대중의 반응 또한 아주 빠르게 피드벡되었다. 이는 공론장의 쌍방향성이 훨씬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주류 미디어의 메시지가 뉴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생각 못했던 일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메시지의 변용이다. 단지 메시지가 ctrl-x, ctrl-v로 단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융합되어 전달되는 일이 훨씬 용이해졌다. 그런 점에서 이제 뉴미디어의 대중은 생산자이자 기획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의 원본성(Originality)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신이나 진리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변용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신이나 진리를 소비할 뿐 아니라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존재가 바로 대중인 것이다.
그런 변화가 가속화되고 급진화되면 주류 미디어와 뉴미디어 사이의 관계에 역전이 일어난다. 이젠 주류 미디어가 뉴미디어를 따라다닌다. 이 신흥 공론장들의 텍스트를 재활용하는 경쟁에 주류미디어들도 열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에 대중은 주류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스펙 넘치는’ 엘리트들의 말을 그리 경청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대중이 미디어스타를 발굴하고 양생(curing)하는 일도 흔했다. 이렇게 다른 미디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뉴미디어의 쌍방향성이 강력하다는 점은 이곳에서 정치적 대중의 탄생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데 인터넷 공론장의 대중은 낡은 것의 청산도 주도한다. 압도적 다수의 대중에 의해 ‘낡은 것들’로 낙인 찍힌 것들이 청산 대상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한국개신교다.
‘미디어전사’
개신교가 적극적으로 뉴미디어 선교를 시작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이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터넷이 빠르게 사람들의 일상에 침투하게 되었음에도 교회는 상대적으로 이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교회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담론이 활개치는 곳이 인터넷이었다. 이에 교회들과 선교전문기관들이 주도하는 미디어 프로그램들이 속속 개설되었다. 그때가 대략 2천년대 초였다. 이 프로그램들의 모토는 ‘새로운 선교지에서 활약할 인터넷 사역자 양성’이었다. 한데 그들 인터넷 사역자들의 주된 미션은 안티기독교 활동가들과 전투를 벌이는 일이었다. 해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이들을 ‘미디어전사’라고 부르곤 했다. 물론 이때 ‘미디어’는 ‘뉴미디어’를 가리킨다.
초기에 ‘미디어전사’들은 일종의 21세기 버전의 변증가였다. 변증가는 외부의 담론적 공격에 대해 방어적 논쟁을 벌이는 전문가들이다. 즉 그들은 내부의 개혁이 아니라 외부의 공격에 방어하는 자들이다. 만약 개혁자들이 이들 변증가들 만큼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한국개신교는 성찰 없이 변명만 늘어놓는 종교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 시기 성장세를 타고 있던 교회들은 보수주의의 자장 내에서 내부 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품격을 강조하는 교회윤리’, 가령 (성장지상주의에 대해) ‘우리의 풍요는 신이 위임한 것이다’, (교회세습 풍조에 대해) ‘은퇴는 반납이어야 한다’ 같은 신앙윤리를 강조하고 있던 교회들은 변증가 만큼이나 내부개혁가를 중요시했다. 이때 이런 윤리의 주체는 항상 ‘가진 자’들이다. 하지만 쇠락하고 있거나 부정적인 사회적 평판에 둘러싸인 교회들은 내부개혁보다는 외부의 공격에 훨씬 민감했다.
한편 미디어전사들 가운데 공세적 활동을 벌이는 이들이 있었고, 교회 엘리트들, 특히 쇠락의 압박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활동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기조가 점차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되었다. 이 전환 과정에서 공격의 주요 타깃은 개신교 안팎의 진보적 활동가들과 개혁적 정치세력이었다. 그들을 척결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빨갱이, 동성애자, 무슬림 같은 ‘멸망되어야 할 자들’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디어전사들을 지칭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개신교 극우 혐오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언제 활개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시민사회가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한 때는 2018년 무렵이었다. 《한겨레신문》이 극우성향의 ‘에스더기도운동선교회’의 미디어학교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이 미디어학교에선 반공, 반이슬람, 반동성애, 반문재인 담론을 생산하는 ‘가짜뉴스 공장’이자 혐오담론의 ‘정치플랫폼’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사람들이 품었던 가장 큰 의문은 ‘도대체 그 재원이 어디인가’였다. 투철한 헌신이 그들의 중요한 동력임은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인력과 장기간의 활동은 헌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해서 많은 설들이 제기되었다. 특정 대형교회들, 국정원, 심지어 청와대 설이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무것도 입증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 다수의 그런 민간기관들이 활동했고 몇몇 대형교회 인사들이 정권안보에 적극 관여하고 있었다는 직간접적인 증거들로 유추해 본다면, 그런 의혹들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단체가 이런 유착의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는 설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이 탄핵된 이후 미디어전사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개신교 내에서 극우 성향의 분파가 위축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많은 교회들은 극우 편향의 목사와 장로들의 목소리로 과잉대표되고 있었다. 한데 그에 반대하는 신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교회가 선을 넘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그런 갈등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이는 교회 엘리트들의 갈등조정 능력이 빛을 발한 덕이다. 무한경쟁의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신자유주의의 전사들인 그들 다수는 교회만은 조용하길 바랐다. 그들은, 이념을 둘러싸고 색바랜 전투나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전쟁 속의 안식처가 되는 교회를 꿈꾸었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가 온통 보수 대 진보의 갈등에 휩싸여 있었음에도, 교회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특히 불과 얼마 전까지도 혐오주의적 목소리를 소리높이 부르짖었던 목사들과 장로들 다수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런 양상을 불만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던 교회 안의 강경 혐오주의자들은 교회 밖의 전장을 찾아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에는 미디어전사들의 활동을 후원했을지 모를 정부가 탄핵되었고, 또 다른 후원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들 다수가 잔뜩 움추렸다. 자금이 말랐다. 또 혐오주의적 활동을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런 고립감과 공포에 익숙하지 못한 젊은 극우주의자들은 동요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2020년 어간부터 미디어전사들이 활약했던 개신교계 기관들의 정치적 행보가, 몇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다. 어쩌면 미디어전사들을 양성하는 기관들도 힘을 잃었고, 많은 미디어전사들도 그 기관들에서 이탈해서 다른 공간을 찾아 떠돌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이때 대안적 공간이 부상했다. 전광훈으로 상징되는 거리의 태극기전사들이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실은 그들도 주류 교회들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던 차였다. 그들에 공감하는 교회의 극우파들 다수는 ‘샤이한 동맹자’였다. 수백 회가 계속되기까지 집회들은 수십 명, 많아야 백여 명 정도가 모였다. 물론 가끔은 좀더 큰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데 젊은 미디어전사들은, 크든 작든, 그곳에서 그리 만족하지 못했다. 미디어전사들에게 광장의 극우 퍼포먼스는 너무 낡은 방식이었다. 이들 집회들은 그들 특유의 날렵함이 발휘되지 못했다.
그러다 그들이 발견한 곳이 인터넷의 극우 공론장들이었다. 그곳에선 개신교 변증가가 될 필요가 없었다. 또 ‘적’을 향한 공세를 퍼부을 때도 낡은 관행으로 똘똘 뭉친 교회의 신앙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단일한 명령체계에 의한 조직적인 작업도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단일한 명령체계와 조직적 활동을 위해서는 수직적 지휘체계와 하위활동가들의 자발적인 충성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런 시스템이 관행화된 ‘잘 짜인’ 조직인데, 그것을 위해 교회는 무수한 ‘대면활동’(contact activity)을 수행한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엔 잘 짜인 조직도 위계화된 서열체계도, 그리고 구성원들에게 그런 체계를 몸에 각인시키는 대면적 활동도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생리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반면 새로운 공론장은 더 개체적이면서 더 네트워크화된, 진정한 뉴미디어 공간에 가까웠다. 또한 거기에 몇몇 현직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고도의 정치공학에 참여할 기회도 있었다. 게다가 (매스)미디어들이 좀더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그 덕에 그들이 추구한 이른바 ‘이대남’의 정치는 효능감 넘쳤다. 그럴수록 그들의 혐오주의적 태도는 더 강화되었다.
언택트 시대, 미디어전사가 떠난 교회들에서 일어난 일들
코로나의 대대적인 침입이 시작되었다. 인류가 한동안 겪지 못했던 가공할 재앙이다. 건물이 파괴되는 것도 아니고, 산도 강도 나무도 동식물도 거의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지만, 사람들만을 콕 집어 공격한다. 비대칭무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성자탄(neutron bomb)도 이것에 비할 바 없다. 이에 대항하는 인류의 방어체계의 하나가 ‘언택트’다. 학교도, 직장도, 병원도, 심지어 사적 친밀성도 이 새로운 관계 규칙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대면적 관계 양식을 최소화하고 비대면 양식을 최대화하는 것.
이는 것은 뉴미디어의 규정력이 극대화된 사회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공부도, 일도, 예술활동도 뉴미디어를 통해 수행할 때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뉴미디어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활동공간은 더 쇠락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정치도 그렇다.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재앙인 이 코로나 국면이, 뉴미디어를 매개로 정치적 전투를 벌이는 미디어전사들에겐 축복이었다. 한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 인터넷 극우정치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전사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교회 밖으로 뛰쳐나온 개신교계 극우 혐오주의자들이었다.
개신교에는 이런 변화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난 연재글들에서 수차례 말했듯이, 언택트가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new nomal)을 표상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부상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강력히 저항했다. 이때 교회의 반발은 ‘예배 중단은 종교탄압이다’라는 표어로 대변된다. 교회는 언택트를 예배 중단 위협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언택트 시대 위협받은 것은 예배만이 아니다. 각종 선교활동과 교육 프로그램도 중단되었다. 실은 예배는 이전부터 뉴미디어를 통해 중계되기도 했으니 완전 중단은 아니다. 한데 선교와 교육 활동은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인터넷선교 활동가를 양성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교회 활동도 멈추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 미디어전사들에겐 교회라는 틀이 잘 맞지 않는 옷과 같았는데, 이런 상황은 그들이 교회를 떠날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었다. 게다가 예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그들을 엮고 있던 가느다란 끈조차 더 헐거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글 서두에서 1980년대 진보적 개신교 청년활동가들과 2020년대 극우적 개신교 청년활동가들 사이의 평행이론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들이 정치적 활동의 새로운 장을 교회 밖에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1980년대 진보적 개신교 청년활동가들의 대대적인 이탈로 인해 교회는 더욱 견고한 보수주의의 아성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슷한 현상이 2020년 한국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을까.
현재로선 예단하기 어렵지만, 당장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개신교 청년들과 관련된 교회의 풍경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 세력과 동맹 맺은 자들에 대한 혐오가 신앙의 핵심이라는 주장을 고수하려는 이들은 더 강경하게 청년들을 단속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반대서약, 순결서약 같은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이런 교회 풍경이 가장 익숙하다. 한데 정착 이런 서약을 강요하는 곳에 청년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여전히 남아서 그 서약의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은 신학생들과 젊은 목회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극우도 진보도 아닌, 스카이캐슬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스펙 쌓기의 공간으로 용이한 교회들에는 청년들이 넘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모든 타인의 기를 빨아 자신의 풍요를 충족시키는 흡혈귀가 될 예비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1980년대 이후 괴멸되다시피 한 진보적 청년의 고갈 현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데 최근 여전히 신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은 새로운 아디덴티티를 실험하는 교회들로 모이고 있다. 이들은 언택트 시대 극우 혐오주의 활동가가 사라져가고 있는 개신교 교회들 속에서 혐오주의의 반대편에는 성공지상주의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이 있음을 발견하려 한다. 나는 이들이 언택트 시대 혐오주의의 화신들과 신자유주의적 흡혈귀들의 세상에 맞서는 ‘평화 지킴이’가 되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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