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9일, 제4회 한반도평화신학포럼 때 발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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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
모스코바와 맥도널드, 그리고 세계화의 시작과 종말의 징후
2022년 5월16일, ‘로이터통신’ 발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모스코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영업 중인 847개 맥도널드 매장 모두 영업을 중단하고 철수한다는 것이다. 맥드널드가 모스코바에 첫 영업점을 개설한 것이 1990년이니, 32년 만의 철수다.
프랑스의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은 세계화란 미국화에 다름 아니며, 이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함축하는 천박함의 문명을 비꼬면서 ‘맥몽드’(McMonde)라고 비아냉댔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윤만을 추구하면서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는 ‘맥노널드 문화’가 세계화를 특징짓는 문화논리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맥도널드가 세계화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부상한 것은 맥도널드의 모스코바 진출 이후다. 한데 그 맥도널드가 모스코바에서 철수한다는 것이다. 하여 맥도널드의 모스코바 철수를 보도하는 매체들은 발 빠르게 ‘세계화의 종말’을 말하기도 했다.
왜 하필 모스코바인가? 사막지대인 네게브의 맥도널드 점이야말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자본 침투력의 끝판왕이 아닌가? 데탕트 시대 이후 미국과 지속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이란은 아직 맥도널드가 진출하지 못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인데, 그곳에 맥도널드 점이 입점한다면 세계화의 완성이라고 해도 될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맥도널드를 세계화의 키워드로 읽는 이들의 심상에 떠오르는 것은 모스코바 입점이라는 사건이었다.
‘세계화’란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된 근대적인 공간적 장벽을 돌파하는 관계의 재구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모든 근대적 장벽들 중 모스코바로 표상되는 장벽의 구축과 해체가 세계화의 시작과 종말의 징후를 표상하는 장소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냉전의 벽’을 돌파하는 것이 세계화의 실제 전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한다.
‘세계화의 종말=신냉전의 출현’이라는 해석
2022년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반러시아 감정이 전 세계 곳곳에서 극도로 고조되었고 이런 반러 기조에 힘입어 수많은 국가들이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 맥도널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하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제재 국면에서 발생했다. 해서 세계화의 종식을 말하는 주장이 실제로 가리키는 징후적 사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그것은 이 전쟁으로 유럽에서 냉전체제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월29일 개막된 나토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신전략개념’(New Strategic Concept)은 유럽에서 신냉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물론 세계화 종말의 징후는 그 이전부터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노동비용을 절감하고 원재료 공급이 원활한 최적지를 찾아 해외 각처로 떠나갔던 기업들의 자국 복귀를 뜻하는 리쇼어링(reshoring) 현상이 2010년대 이후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화가 심어놓은 장밋빛 꿈을 공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원자재와 최종상품의 생산, 그리고 소비에 이르는 국경 없는 연동체계인 글로벌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을 촘촘하게 구축하는 과정으로 진행되는 세계화는 최고급 품질의 상품을 저렴한 비용으로 공급함으로써 상류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고품격 삶의 질을 더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했다. 아니 그런 이데올로기로 둘러싸인 담론체계가 세계화다. 그런데 이런 이데올로기는 최저생계수준을 훨씬 초과하는 수익이 보장된 이들이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어야 실현될 수 있는 담론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런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졌고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에 몰두하거나 깊은 절망감에 좌절하여 무능력자로 전락했다. 세계화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풍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글로벌가치사슬은 원자재에서 최종상품에 이르는 체계적인 공급망이 월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파장은 기업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 나아가 전 지구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즉 글로벌가치사슬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글로벌공급망(global supply networks)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글로벌공급망의 구축은 주로 국가의 역할과 밀접히 연결된다. 또 국가간 우호적 상호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이런 불안정성은 상존한다. 가령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발생한 중국의 경제보복은 한・중 간의 글로벌가치사슬을 무력화시켰고, 일본의 반도체 ‘소・부・장 보복’ 또한 한・일 간의 글로벌가치사슬을 무력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글로벌공급망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이 점점 자주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에 해외로 떠난 기업들의 리쇼어링을 요구하는 사회적 여론이 들끓었다. 이러한 여론은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기업의 리쇼어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기술집약성이 높은 기업들은 제조의 스마트화를 통해 노동비용을 절감하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노동자의 역할을 AI가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기업의 리쇼어링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취업률이 기대한 만큼 높아지지는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세계화는 중산층의 몰락과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지성주의와 증오의 정치의 심화는 세계화가 초래한 양극화 위기의 반향으로 해석되곤 했다.
그래도 2019년까지는 글로벌공급망의 위기가 어느 정도 관리되고 있었다. 한데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직면해서 글로벌공급망은 거의 전 영역에서 마비되었다. 그렇다면 세계화 체제 몰락의 결정적 원인일 수 있는 코로나 팬데믹의 발생 이유는 무었일까. 박쥐와 공생관계에 있던 바이러스가 종을 넘어 인간에게 감염되는 이종화(hybridization of viruses) 현상은 가장 널리 통용되는 가설인데, 이것은 세계화가 낳은 부작용이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종의 경계’를 넘는 바이러스의 거대한 이동은 세계화의 산물인 동시에 세계화 종식의 결정판이라는 얘기다.
더욱 심각한 것은 기후위기다. 그로 인한 재앙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거대하고 치명적이다. 하지만 위기를 방어하거나 극복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데 이런 기후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세계화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세계화는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던 지구의 자정능력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 퇴조의 징후들이 누적되고 있는 시점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벨라루스도, 조지아도, 체첸도 러시아 푸틴체제의 호전성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땐 이번과 같은 거대한 반러 여론이 세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한데 이번엔 달랐다. 세계는 러시아에 분노했고, 전쟁 이후 세 달 동안 모른 체하며 모스코바 점을 유지하던 맥도널드 경영진도 마지못해 철수를 선언했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세계화의 징후들보다 더 결정적인 세계화 종식의 징후로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부각시킨 것은 미국의 바이든 정부의 전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바이든 정부는 전쟁 이후 발빠르게 냉전적인 글로벌공급망을 무기화하는 기획을 했다. 반도체와 배터리의 국제공급망에서 러시아를 배제(decoupling)하고자 한 것이다. 반도체와 배터리는 2019년 이후 유럽과 미국의 경제전문가들에 의해 지난 세기의 석유처럼 새로운 글로벌공급망의 핵심자원으로 평가되곤 했다. 해서 그들은 글로벌공급망의 안정을 위한 ‘새로운 오펙(OPEC)’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때까지 ‘새로운 오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장들은 글로벌가치사슬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제기되었다. 한데 바이든 정부의 재무장관이자 저명한 경제학자인 자넷 옐런(Janet Louise Yellen)은 ‘가치동맹’(value alliance)의 필요성 속에 글로벌공급망이 재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국과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글로벌공급망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해서 그녀는 반러시아, 반중국의 가치동맹세력이 결속하여 재구축한 글로벌공급망 안에서 글로벌가치사슬이 작동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업들이 자국으로 회귀하는 리쇼어링이 아닌 동맹국 간의 네트워크 안에서 움직이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글로벌가치사슬’의 ‘가치’(value)는, 앞서 말했듯이, 냉전의 장벽 같은 일체의 단절의 장소성을 꿰뚫는 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고품격의 상품을 저렴하게 소비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꿈이 함축되어 있다. 반면 ‘가치동맹’의 ‘가치’는 이웃나라(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조지아, 체첸 등)를 침략하는 것에 반대하고, 소수민족(티벳, 위그르 등)의 자존권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주장되었다. 물론 이 ‘아름다운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함은 현실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 속에는 미국의 헤게모니 전략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이든 정부는 글로벌공급망의 재구축 동기를 ‘경제’에서 ‘윤리’로 전환시키려 한다. 물론 이 ‘윤리’에는 단절의 장소성으로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적 욕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의 장소성을 통한 세계의 질서를 대표하는 것이 냉전체제다. 즉 경제에서 윤리로의 프레임 이동은 세계화에서 냉전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이윤을 통한 가치사슬을 구축하는 데 주축의 역할을 한 것은 ‘뉴욕’으로 상징되는 금융시장세력이다. 반면 워싱턴은 정치적 헤게모니 담론이 형성되는 상징적 장소다. 해서 미국적 관점에서 탈세계화와 신냉전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한다면, 세계화 시대가 ‘뉴욕’의 헤게모니에 ‘워싱턴’이 견인되는 시대였다면, 냉전 시대는 ‘워싱턴’의 헤게모니에 뉴욕의 금융자본의 욕구가 견인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새로운 냉전’ 체제의 도래를 통해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한다. 해서 많은 매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세계화의 종말과 신냉전 시대 도래’의 결정적 징후라고 해석하곤 했다.
‘신냉전이 아니라 전략적 냉전’이라는 해석
지금까지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세계화의 종말과 신냉전의 출현 계기로 해석하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말했듯이 그런 해석을 주도한 것은 바이든 정부였다. 여기서 우리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 소르망이나 브루디외 등 많은 사상가들에 의하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세계화의 흐름들을 주변화시키고 마치 하나의 거대한 흐름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미국적인 천박한 자본주의였다. 해서 그들은 세계화란 미국화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데 미국의 바이든 정부가 세계화 종말 시나리오를 주도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모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세계화를 종식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이후 자국 GDP의 40%를 상회하는 나라가 있을 경우 그 나라의 성장잠재력을 무너뜨려 왔다고 한다. 1970년대 소련이 그랬고 1980년대 일본이 그랬다. 한데 2천년대에는 중국이 그런 나라로 부상했다. 중국이 미국 GDP의 40% 수준에 도달한 때는 2008년 무렵이었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 발 금융위기로 허덕이던 미국은 어떠한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2020년에는 70%를 상회했다. 해서 미국의 권위 있는 싱크탱크인 부르킹스 연구소는 2028년에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데 중국의 급성장은 세계화의 결과였다. ‘핑퐁외교’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을 가르던 ‘죽의 장막’이라는 이름의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중국도 세계화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 편입되었다. 그것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전 세계는 ‘made in China’가 기재된 상품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나라는 중국이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주도한 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글로벌 자본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화 담론의 중심 장소는 ‘뉴욕’이다. 그러니까 중국을 글로벌가치사슬에 편입시킴으로서 벌어질 세계화의 장밋빛 판타지를 주도한 담론 세력은 뉴욕 중심의 글로벌 자본인 것이다. 전 세계의 자본들은 이 미국적 세계화 담론에 충성스럽게 공조했다.
한데 또 다른 미국은 그런 중국의 상승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를 우선으로 하는 세력이다. 그리고 그런 국가주의적 담론의 중심 장소는 ‘워싱턴’이었다. 여기에는 미국정치를 주도하는 두 당인 민주당이나 공화당 모두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민주당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오바마와 바이든 정부가 그랬다. 특히 추월당할 위기에 발등 찍힌 바이든 정부는 굉장히 강력한 중국 압박에 나섰다.
앞에서 언급한 나토정상회담에서 채택된 ‘신전략개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면서 과거에 ‘전략적 파트너’였던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냉전의 장벽’을 세우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한데 이 대목에서 뜬금없이 중국을 등장시킨다. 중국이 러시아에 적극적인 공조세력임을 천명한 바 없었음에도 나토의 이익과 안보와 가치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중국의 강경한 반응을 야기시켰다. 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장벽이 재구축된 것이다.
그런데 나토의 이런 태도가 과연 나토 가입국의 일관된 입장일까. 주목할 것은 신전략개념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랑스 등 나토 중심국가들을 포함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은 냉전의 장벽을 재구축하는 일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해서 나토의 신전략개념은 나토의 모든 회원국의 실질적 동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이든 정부의 입장을 과도하게 반영한 것이다. 해서 바이든이 강조하는 ‘윤리의 장벽’은 나토 회원국들에서조차 균열이 심한 허술한 장벽이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이던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이 러시아와 중국의 제제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고,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남아공, 멕시코 등 각 대륙을 대표하는 비동맹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든 정부는 ‘가치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윤리적 장벽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그 ‘윤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윤리’가 이해관계를 압도하는 행위의 준거로 작동하려면 ‘보편성’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공준받아야 하는데, 많은 나라들은 그 ‘윤리’가 글로벌한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자국 중심주의적인 워싱턴의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이념의 장벽이 윤리적 보편성을 지닌다는 포괄적 합의가 우세한 논리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 논리에 적극적인 세력이 각국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2022년 미국 바이든 정부가 주도한 가치동맹의 윤리는 그런 합의가 부재하다. 앞으로 그렇게 될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그것은 냉전의 재구축이라는 의미의 ‘신냉전’이라기보다는 ‘전략적 냉전’에 가깝다. 냉전에 대한 윤리적 동의보다는 미국의 적극적 경계짓기의 압박에 대한 전략적 동의에 기반을 둔 냉전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해석: 세계화의 확장과 동아시아 탈냉전으로서의 한반도평화체제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보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다. 여기에 북한선수단 46명과 응원단 229명이 참여했다. 한국정부가 주도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공조한 평화이벤트가 꽁꽁 얼어있던 양국의 관계 개선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곧이어 남북회담이 재개되었고, 양국 정상이 만나는 역대급 국제이벤트가 열렸다. 그리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이 이어졌다. 이에 트럼프와 김정운을 회담장 안으로 불러들인 ‘문재인정부의 운전자론’이 부상했다.
운전자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것은 문재인 정부의 평화구상이 한반도를 둘러싼 당사국들의 이해관계를 엮어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화의 대열에 들어선 중국과 러시아는 극동지역을 글로벌가치사슬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세계화의 부작용인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선박이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이런 계획의 실현 가능성이 한층 구체화된 된 것이다. 동북아 지역의 자원을 중계하는 허브항 역할을 두고 동경, 상하이, 부산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 초기인 2014년 드레스덴 선언(Dresden Declaration)으로 한반도평화체제를 위한 구상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북한을 회담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술의 부족으로 그 당시엔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에서 남북철도 건설로 이어지는` 평화구상을 통해 글로벌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글로벌가치사슬을 실현하는 동북아 허브항 경쟁에서 부산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격상시켰다.
이로써 문정부는 뉴욕 중심의 글로벌 자본의 지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여 동북아 허브항으로서 부산을 발전시키는 데 국제적 자본의 투자가 줄줄이 성사되고 있었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남북철도 건설사업에도 투자의 유치가 충분히 기대되었다. 이는 트럼프 정부를 회담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평화구상은 자본의 세계화담론의 망 안에서 디자인된 것이다. 뉴욕 중심의 글로벌 자본은 세계에서 하나 남은 냉전지대인 동북아를 탈냉전화함으로써 이곳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하는 글로벌가치사슬을 가설하여 막대한 초과이윤을 획득하고자 했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자본의 욕구를 평화체제와 연계시킴으로써 ‘명분 있는 세계화’의 알리바이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문정부의 운전자론이 일정한 성과를 이룩한 이유였다.
그러나 트럼프 정권이 종전선언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등을 돌림으로써, 문정부의 평화구상은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트럼트 정부가 그런 변덕을 부린 것은 이 정권의 원천적인 불안정함이 낳은 결과였다. 트럼프체제는, 비교적 안정된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오바마 정권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의 전략적 결합체였기에 집권 이후 일관된 정치를 펴지 못했다. 트럼프 자신이 투기자본가로서 정치적 공리보다는 이윤지상주의적 실용정권을 추구했음에도, 동시에 존 볼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파적 극우이념세력에 경도되곤 했다. 볼턴은 트럼프가 동아시아 냉전체제를 해체함으로써 중국의 팽창주의에 기회를 주는 통치자가 되지 않도록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여 2018년부터 이듬해까지 왕성하게 전개된, 동북아 지역의 세계화 프로젝트는 냉전 해체를 실현시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냉전과 세계화를 둘러싼 경쟁에서 냉전이 주도권을 쥐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은 바야흐로 전 세계를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 넣었다. 지속적으로 냉전을 추구한 일본과 모호한 태도의 대만, 그리고 세계화를 적극 추구한 한국의 윤석렬 정권은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보다 더 강력한 냉전세력으로서 갈등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
한반도평화체제에 관한 문재인 정부의 구상은, 위에서 보았듯이, 세계화의 확대를 지향하는 자본 분파의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어찌 보면 그러한 자본의 욕구를 ‘공공성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활용한 결과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문정부의 평화체제 구상은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리고 있는 북극 빙하를 자본축적에 활용하려는 자본의 욕구에 편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공공성의 위험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문정부의 구상은 세계화의 확대가 가져다줄 성장에 대한 국가주의적 낙관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이 분배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에 대해서 이렇다 할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평화체제가 가져다 줄 막대한 경제적 이윤이 낙수효과로 이어질 것을 막연히 기대했던 것 같고, 다른 한편 문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국가복지 정책이 그것을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면 국경을 넘는 인구의 유입이 크게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국가복지는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일 수 없다. 물론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조국이 주도한 헌법개정안에서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해법, 아니 최소한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발의한 이 헌법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되지도 못했다. 야당과 주류 언론의 반대도 강했지만, 문정부를 구성하는 다수의 인사들도 이 논점에 대해 공감하지 않았다. 해서 문정부는 집권기간 내내 이 논점을 반영한 어떠한 개혁조치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한편 문정부가 주도했던 평화구상의 실패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보다는 냉전의 정치가 더욱 활개를 띠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트럼프 정부가 이후 대중(對中) 견제에 적극적 행보를 취하게 된 것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냉전의 장벽을 허물고 글로벌가치사슬을 더 촘촘하게 작동하게 하려는 자본의 관심을 제한하는 효과가 있었다. 여기에 바이든 정부는, 앞에서 말했듯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냉전의 장벽을 강화시키는 정치를 폈다.
그러는 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 삼아 냉전의 선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화를 종식시킨 것은 아니다. 그런 해석들은 센세이셔널리즘에 경도된 과잉해석이다. 글로벌가치사슬과 글로벌공급망이 냉전의 장벽에 막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화 추세는 단절되었지만, 그 단절의 장벽 내에선 어떠한 장벽에도 구애받지 않는 세계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화는 지속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제넷 옐런의 ‘프랜드쇼어링’은 자국을 떠난 기업들이 모든 글로벌가치사슬을 철폐하고 자국으로 리쇼어링하기보다는 동맹국들 내에서 여전히 오프쇼어링(offshoring)하는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해서 ‘세계화 종식’이 아니라 단절과 지속의 세계화라는 뜻의 ‘포스트세계화’라는 말이 현재의 지형에서 더 적합한 표현이다.
아무튼 세계화는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많은 이들은 몰락하는 한편에 속하지 않기 위해 살인적인 무한경쟁에 혼신을 다하게 되었고, 이미 몰락한 이들은 상승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채 무력감과 좌절감을 안고 살아간다. 한데 그것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매우 폭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더 약한 이들’을 향한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이런 폭력은 인종, 성, 비국민 등을 향한 범주적 공격성으로도 나타났다. 전 지구적으로 범주적 폭력(categorial violence)이 급증했다. 흔히 ‘혐오범죄’(hate crime)라고 부르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혐오주의를 부추기는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벌어진 러시아계 우크라아나인들을 향한 신나치주의자들의 대규모 혐오범죄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명분이 되었다. 한편 ‘더 약한 인간’만이 이러한 폭력성의 유일한 피해자는 아니다. 비인간적 존재들, 나아가 비생명체들도 인간의 폭력성의 희생자가 되었다. 여기에 세계화로 인해 극대화된 지구 파괴 문명도 문제다.
세계화가 낳은 이런 위기가 냉전체제를 불러왔다. 즉 포스트세계화가 오늘날에는 냉전이 확대되는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다. 한데 그것은 인간의 폭력성, 혹은 인류 문명의 폭력성을 성찰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퇴행적으로 해석한 정치 공간의 확대를 뜻한다.
오늘의 민중신학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여기다. 귀속 공간을 박탈당한 존재들, 민중신학이 오클로스라고 부른 존재들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스스로 말하지 못한 채 죽음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냉전의 장벽은 글로벌가치사슬을 구축하는 기업들의 이동을 제한하는 거대한 하나의 장벽으로 존재하지만, 오클로스들에게 냉전의 장벽은 무수한 ‘미시적 장벽들’로 구현된다. 자이니치 경제학자 강상중은 그것을 ‘내적 국경들’이라고 불렀다. 즉 포스트세계화의 공간 구석구석에 무수한 내적 국경들이 촘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해서 그 장벽을 넘지 못한 오클로스들은 장벽 주변에서 주검이 되고 있다.
장벽 저편의 주검이 되어가는 오클로스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이야기할 언어를 잃어버린 자들이다. 민중신학은 그런 이들의 증상을 ‘사회적 실어증’(social aphasia)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유실했으니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자 곧 주검이 된 자들인 것이다. 하여 주검 같은 존재들인 오클로스들은 계급으로 주체화되지 못한 비계급이며 서민의 자격을 박탈당한 비서민, 곧 언더클래스(underclass)이고 언더커먼스(undercommons)다. 민중신학은 오래 전부터 실어증 상태에 놓인 이런 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은폐된 몸의 언어를 경청하며 그것을 사회에 증언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왔다. 또한 그들을 실어증 걸리게 만들어 놓은 질서에 균열을 내는 것을 과제로 삼아왔다.
세계화에 공공성을 부여하든 아니면 (전략적) 냉전체제에 공공성을 부여하든, 모든 장벽을 허물든 냉전의 장벽을 가설하든, 그런 공공성은 언더클래스 혹은 언더커먼스들에겐 ‘루저들의 게토’로 내몰리는 질서에 다름 아니다. 왜냐면 그 공공성은 계급으로써 혹은 시민으로써 사회적 발언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참여하는 공론장(규범적 의사소통의 장. 하버마스)에서 소통되고 합의된 공공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민중신학은 규범적 공론장의 의사소통 체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리를 발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 규범적 공론장은 마치 종교처럼 절대적 진리의 보증을 받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그런 질서의 종교성을 비판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것이 민중신학이 필요한 이유다.
한편 규범적 공론장에서 배제된 이들, 언어를 박탈당하고 죽은 자처럼 존재하는 언더클래스 혹은 언더커먼스들은 불협화음 같은 존재다. 그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를 발화하거나 퀴어적인 귀괴한 몸짓으로 발화한다. 규범적 공론장은 그들의 소리를, 몸의 언어를 듣지 못한다. 해서 규범적 공론장이 만들어낸 질서에는 그런 이들이 배제되어 있다. 급진민주주의론을 제기한 에르네트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이런 불협화음의 공론장을 아고니즘적 공론장(agonistic space)이라고 불렀다. 한국의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정신장애자들의 요양병원에서 아고니즘적 공론장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상상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민중신학은, 상상적 공간이든 실재하는 공간이든 이 드라마처럼 불협화음들이 공감을 일으키고 소통을 구현해가는 장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규범적 공론장에서 전시하는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 정부는 포스트세계화 시대의 평화문제를 언더클래스 혹은 언더커먼스를 생략한 채 만들어내는 공공성으로 구체화하려 했다. 윤석렬 정부는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의 이해 확대에 집착하면서 그것이 마치 서민에게도 유용한 것임을 공론장에서 펴고자 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어느 경우든 그런 공론장이 언더클래스 혹은 언더커먼스에게는 위선적이며 폭력적인 공공성에 지나지 않음을 고발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데 여기서 민중신학은 좀더 확대된 지평으로 생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안병무는 그것을 죽임의 체제를 넘어서는 ‘살림’이라는 화두로 제기한 바 있다. 문정부의 평화체제가 함축하는 공공성이 지구적 공공성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그것이 죽임의 체계와 동거하는 평화담론임을 시사한다. 윤석렬정부의 핵에너지 확장론은 좀더 노골적인 죽임의 체계를 보여준다. 캐서린 캘러는 언더커먼스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하여 해석한다. 서민의 체계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모든 존재가 언더커먼스다. 하여 안병무의 오클로스를 살리는 체계인 ‘살림’은 캐서린 캘러가 추구하는 우주적 언더커먼스를 포괄하는 공공성의 체제로서의 종말론 담론과 뒤섞인다. 하여 우리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은 포스트세계화 시대의 다양한 공공성들이 간과하고 있는 배재된 존재들의 ‘살림’에 관한 담론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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