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2022. 03+04와 05+06에 나누어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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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들, 그들과 그녀들
‘장소’와 예수운동
대중활동 주요 거점(장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예수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그 특징을 이해하는 데 퍽 유용하다. 첫 번째 주요 거점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했던 베레아(Perea) 지방의 요르단강 인근 지역이었고, 요한이 당국에 체포된 이후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마을회당에서 바리사이와 회복할 수 없는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이후 예수 일행은 갈릴래아의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벌이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렇게 대중활동의 주요 거점이 달라질 때마다 그이 주위에 몰려든 대중의 다수도 다른 범주의 사람들로 바뀌었다. 해서 장소의 변화에 따라 예수운동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예수가 대중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베레아와 갈릴래아는 모두 안티파스의 영토였다. 하지만 두 장소는 매우 다른 곳이다. 갈릴래아는 안티파스 영토뿐 아니라 시리아-팔레스티나 전 지역 중에서 농경지가 매우 발달한 곳에 속한다. 특히 베레아에 비해 농지가 많았기에 인구밀도도 휠씬 높았다. 도시가 거의 없었으니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경지대인 갈릴래아 호수 인근 지역엔 어민이 제법 많았다.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려진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등은 갈릴래아 호수 북단의 어촌마을 가버나움(Capernaum)의 어부들이었다.
반면 베레아는 전 지역이 황량한 광야와 산지뿐인 곳이다. 해서 인구도 희박하다. 베레아의 동편에는 강대국인 나바테아(Nabatea) 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서편에는 요르단강과 사해가 있었다. 국경지대인 동편에는 군사요새가 매우 많았으니, 이곳에 거류하는 이들 다수는 안티파스의 용병들이었다. 한편 서편에는 광야수행자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이스라엘 종교 전통에 깊은 신심을 가진 이들이었다.(1) 즉 베레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 중 다수는 대를 이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이 아니라, 마치 고속도로의 휴게소처럼 일시적으로 머물러 살면서, 전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자의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런 장소의 성격을 ‘비장소’(non-pla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통상 장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전통이나 토착종교의 영향력이 약한 곳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에 관한 이론이다. 이를 베레아에 적용한다면 용병과 광야수행자가 이곳에 특별히 많고 그들이 그 지역뿐 아니라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 미치는 파급력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갈릴래아는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장소는 갈릴래아의 ‘마을 회당’이고, 두 번째 장소는 갈릴래아 마을 밖 ‘호숫가’다. ‘마을회당’은 전통적 장소로서의 의미가 집적된 곳이다.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 대다수는 평생 마을밖을 떠날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은 조상의 전통 속에 살고 있다. 하여 그런 전통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질서는 일종의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질서를 신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곳이 바로 마을회당이다. 이곳에서 하느님나라 운동을 벌였던 예수의 활동은 전통적 삶의 양식과 인습적 기억, 그것의 신적 해석체계에 대해 그이가 비판적 인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회당의 지배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인 바리사이와의 충돌을 통해 예수운동의 특징이 구체화된다.
마을 밖 호숫가는 당시 갈릴래아의 전형적인 ‘비장소’에 속한다. 이곳에는 마을회당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들이 부유하는 물결처럼 떠다닌다. 몰락한 농민들, 질병과 악령에 들려 부정타게 하는 자로 낙인찍힌 이들, 그리고 상인들과 순례자들, 군인들, 세관원들, 매춘여성들이다. 〈마가복음〉은 이런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떠돌이들을 ‘오클로스’(οχλος)로 명명했다.(2) 오클로스와 예수의 만남, 그들의 상호관계가 예수운동의 특징을 이루게 되는데, 그런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 이야기가 바로 〈마가복음〉이다. 곧 이 복음서는 오클로스가 기억하는 예수전이다.
마지막 대중활동 거점은 예루살렘이다. 이제까지는 예수와 무관했던 곳이다. 단지 유토피아처럼 상상 속의 해방의 장소처럼 마음으로 간직했던 곳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해방의 중심지가 아니라 권력이 응축된 곳으로 보았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그런 권력 자체였다. 해서 예수는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일갈했다. 그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시스템의 근원적 해체 주장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예수 실천의 요체였다. 곧 예수는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토피아적 공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디스토피아적 공간에 다름 아님을 고발한다. 실은 이것은 그의 전임자이자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주장이기도 했다. 한데 광야에서 그런 주장을 편 요한과 달리 예수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 한가운데서 해체의 실천을 수행한다.
한데 이런 대중운동 거점들을 옮겨다니며 펼쳤던 예수운동의 주역들은 어떤 이들일까. 이 글은 바로 이들 예수운동의 주역에 주목해 보려 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떠돌이 예언자 집단이 그들이다. 성서는 이들을 ‘제자’라고 부른다.
제자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마가복음〉 1,16~20
여기서 ‘버리다’(아피에미, αφιημι)와 ‘따르다’(아콜루쎄오, ακολουθεω)라는 두 동사가 주목된다.(3) 이 두 단어는 복음서에서 ‘제자’(마쎄테스, μαθητης)로 부름받은 이의 행위를 묘사하는 전형적 어휘다. 위의 인용구절에 나오는 네 명의 제자들이 그랬고, 세관원 레위의 이야기에도 이 단어들이 등장한다.(〈마가복음〉 2,14; 〈루가복음〉 5,28)(4)
아주 일찍부터 예수추종자들의 따름의 양식에 관한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단어는 예수운동에 참여한 이들 중 ‘제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운동에 매진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돌아다니는 ‘떠돌이예언자’였다. 이것은 또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수많은 광야수행자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활동가들의 원조는 기원전 9세기 이스라엘국의 저항운동가이자 예언자인 엘리야다. 이 계보에 있는 이들 중에는 혁명가도 있었고 운둔수행자도 있었다. 또 수행자공동체 조직가도 있었다. 떠돌이예언자들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야에 대한 대중전승처럼(5) 그들은 당대 지배적인 종교정치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남자제자들과 여자제자들,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들은 예수와 함께 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루가복음〉, 이 세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제자 명단이 들어있다.
이 명단은 모두 제자들의 숫자를 12명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름도 순서도 명단마다 거의 일치한다. 한데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 속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이들이 절반이 넘는다.(달리 표기된 인물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기억과는 별도로 명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명단에만 등장하는 이들 중 몇은 실제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명단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예수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희석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에서 꽤 영향력 있는 지도자 혹은 그이의 부친이나 조부였을 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예수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이라 할지라도 훗날 그리스도 파의 주류집단에게서 배척된 이는 명단에서도 배제되었을 수 있다. 이것은 명단은 후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명단에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다.(6) 또 ‘버리고 따르다’는 단어와 연결된, 거렁뱅이자 장애인이던 ‘티매오의 아들’로 불린 익명의 남자와 세관원 레위도 제자의 일원이었을 법한데 명단에는 없다. 그밖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했던 몇 명의 여성들도 예수와 떠돌이 예언자 활동을 벌였던 제자단의 일원이었겠지만 그들도 명단에는 빠졌다.
사실 제자단의 수를 자연수 12명에 한정하는 것도 작위적이다. 분명 예수 제자단을 부르는 명칭의 하나가 ‘열둘’이었을 법 한데, 그것이 어느 시기에 12명의 제자단으로 명단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떠돌이’의 생활양식은 대단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해서 열두 명으로 고정된 제자단의 수를 유지하며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때는 더 많았을 수 있고 어떤 때는 훨씬 적었을 수도 있다. 유명하지 않았을 때는 적었겠고 유명해진 뒤에는 좀더 많았을 수 있다. 혹은 제자단 내의 갈등유무에 따라 숫자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서 여건이 좋은 국면에서는 그 수가 많았겠고 열악한 국면에선 더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마다 제자단의 수는 가변적이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제자단을 명단에 의거해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버리고 따름’이라는 떠돌이 예언자로서 예수와 함께 한 이들이 실제 제자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제자들 중에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마가복음〉 15,40~41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27,55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
―〈루가복음〉 23,49
이 구절들은 예수의 자자단 속에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했지만, 그리스도파의 기억에서 배제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이 벌인 결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대체불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가 처형당하던 때 남자 제자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그 현장에 있었다. 또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를 처음 들은 이들은 그들이었다. 아니 부활사건을 기획하고 확산시킨 주역이 그들이었다.(7) 그 일로 인해 예수 메시아 설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예수 사후 예수운동이 되살아났으며 훗날 복음서들로 알려진 예수전도 만들어질 수 있었으며 헬라문화권으로 확산된 그리스도파의 운동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여성에 대한 비하의 문화 속에서 여성 제자들에 얽힌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망각되었겠지만,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더 이상 삭제할 수 없는 기억 덩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이 단락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떠돌이 예언자인 제자들은 12명에 한정되지 않았고, 여러 명의 여자 수행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이자 축귀자였다
그렇다면 그들과 그녀들은 역할이 달랐을까. 아래 구절은 예수와 제자단이 떠돌이 예언자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마가복음〉 6,7~13
떠돌이 예언자는 가장 단촐한 차림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활동을 폈다. 가진 것 권력도 없어서겠지만, 동시에 가족도 재산도 포기한 유랑자의 삶의 양식은 자발적인 선택이자 의지로서 추구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는 축귀 행위가 빈벌했다.
그렇다면 여자제자들은 어땠을까? 여자축귀자는 복음서를 포함한 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구절에서 축귀행위를 남자에 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남자 제자들이 축귀행위자가 아니듯이 모든 여성제자도 축귀행위자는 아니었겠다. 동시에 남자든 여자든 일부는 축귀행위를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남자뿐 아니라 여자제자들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권력의 질서를 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며 그자들의 최후에 관한 예고를 설파하는 활동을 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햇듯이 여성제자들을 예수 이야기에서 배제했기에 ‘그녀들’의 예언자로서의 활약상을 직접적으로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여성 예언자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떠나서,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다.
―〈사도행전〉 21,8~9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밀어 버린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5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묵시록〉 2,20
〈사도행전〉을 제외한 두 텍스트의 경우, 여자예언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여기에는 여자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사도행전〉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보를 만류하는 예언을 한 이가 빌립의 딸이자 여자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도 그녀들이 예언자임을 말하고 있음에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경고하는 예언을 한 이는 남자였다. 아캅보라는 남자 예언자가 그 말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느닷없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 말을 하게 한 것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흐름에 적합한 것은 그녀들이 그 예언을 했다는 것이겠다. 그럼에도 자연스런 흐름을 깨고서라도 중요한 예언의 역할을 남자에게 부여한 것은 필시 여성을 격하시키는 문화의 산물이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여성예언자가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그룹 내에서 실재했다는 사실이다. 하여 우리는 그들과 그녀들은 축귀자이고 예언자로서 예수의 운동에 동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역자였다
한편 제자들도 예수처럼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로 활동했지만,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수행자로서 그이를 보좌하는 활동도 제자들의 일이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섬기다’라는 뜻의 디아코네오(διακονεω)다. 이 단어는 앞에서 인용한 〈마가복음〉 15,41처럼 ‘(여자들이) 시중들다’로 번역되어 마치 여성 특유의 돌봄활동과 관련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마가복음〉 1,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처럼 천사들의 역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가복음〉 10,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처럼 예수 자신의 역할도 이 단어로 쓰였다. 즉 디아코네오는 여성스러운 시중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나라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남자나 여자) 제자가 디아코네오 한다는 말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활동을 보좌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운동에서 남자제자와 여자제자는 사역에 있어서 동등한 존재였다.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문헌 속에는 여자제자의 역할은 망각되거나 격하되곤 했다. 그것은 일상의 장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행위자일 수 없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길 수 없었던 흔적들을 통해 추론해보면 사역에서 남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남자든 여자든 더 주도적 행위자가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이들이 ‘광야수행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선》 2020년 5+6월호에 실린 글 〈또 한 명의 광야 수행자, 같거나 다른〉에서 말했듯이 ‘광야’는 일상의 장소가 아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나는 앞에서 그런 장소를 ‘비장소’라고 개념화한 인류학적 용어로 해석한 바 있다. 비장소로서의 ‘광야’는 그렇게 인습적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에 용이한 곳이다. 그렇다고 모든 광야활동가들이 성적 차별을 해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예수운동은 그랬다. 남자든 여자든 예수운동에서는 차별이 없었다. 예수의 추종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갈라디아서〉 3,28)
그들은 성전체제를 해체하는 혁명가였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혁명의 퍼포먼스를 벌이는 주역이 되었다.(〈마가복음〉 11,15~19; 〈마태복음〉 21,12~17; 〈루가복음〉 19,45~48; 〈요한복음〉 2,13~22) 가령 환전상의 매대를 뒤엎어 버리는 퍼포먼스는 예수 개인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벌인 집단적 퍼포먼스였다. 그 의미는 성전을 수탈의 장소, 그런 장소적 질서가 마치 신의 질서인 양 정당화하고 있는 성전체제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집단적 퍼포먼스는 팔레스티나의 로마주둔군과 성전당국에게는 불온하지만 허용해 줄 만한 저항행위로 해석된 듯하다. 당국은, 명절 때는 크고 작은 불온한 사태들이 일어나곤 하지만 그것이 소요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데 치안의 목표를 두고 있었기에, 그런 사태에 일일이 끼어들어 제압하는 일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예수일행의 퍼포먼스는 불온하지만, 로마주둔군의 관점에서는 아직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이 혁명적 퍼포먼스에 여자제자들도 함께 했을까. 어떤 추정도 가능하다. 물론 완력이 중요한 행위에는 남자제자들이 더 주도적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부활사건을 주도한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끄는 여성 중심의 제자단이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난 이들 혁명가들의 활동에 남자나 여자제자들은 각기 중요한 행위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많은 대중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약에서 신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
[주]
(1) 이런 관점에서 광야수행자 현상을 해석한 글로는 《공동선》 2020년 5+6월호에 게재된 나의 글 〈또 한 명의 광야 수행자, 같거나 다른〉을 참고.
(2) 〈마가복음〉 외에도 이 단어는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곳에선 그 용례가 떠돌이 대중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해서 영어성서나 한글성서는 ‘crowd’나 ‘무리’로 번역하여 성격이 모호한 대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3) 뒷부분의 ‘남겨두다’(아피에미, αφιημι)는 의미상 ‘버리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다”라는 어구도 제자의 따름을 의미하는 전형적 어구다.(〈마가복음〉 8,34; 〈마태복음〉 10,38; 〈루가복음〉 9,23; 14,27)
(5)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말라기서〉 4,5)
(6) 이 코너에 실린 나의 글 〈그녀를 기억한다는 것―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억전쟁〉(2021년 9+10)은 그녀가 예수의 가장 중요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지만, 훗날 그리스도파 주류집단에서 배척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7) 2020년 1+2월호에 실린 나의 글 〈막달라 마리아, 민중 메시아론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을 보라.
‘장소’와 예수운동
대중활동 주요 거점(장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예수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그 특징을 이해하는 데 퍽 유용하다. 첫 번째 주요 거점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했던 베레아(Perea) 지방의 요르단강 인근 지역이었고, 요한이 당국에 체포된 이후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마을회당에서 바리사이와 회복할 수 없는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이후 예수 일행은 갈릴래아의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벌이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렇게 대중활동의 주요 거점이 달라질 때마다 그이 주위에 몰려든 대중의 다수도 다른 범주의 사람들로 바뀌었다. 해서 장소의 변화에 따라 예수운동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예수가 대중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베레아와 갈릴래아는 모두 안티파스의 영토였다. 하지만 두 장소는 매우 다른 곳이다. 갈릴래아는 안티파스 영토뿐 아니라 시리아-팔레스티나 전 지역 중에서 농경지가 매우 발달한 곳에 속한다. 특히 베레아에 비해 농지가 많았기에 인구밀도도 휠씬 높았다. 도시가 거의 없었으니 농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경지대인 갈릴래아 호수 인근 지역엔 어민이 제법 많았다.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려진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등은 갈릴래아 호수 북단의 어촌마을 가버나움(Capernaum)의 어부들이었다.
반면 베레아는 전 지역이 황량한 광야와 산지뿐인 곳이다. 해서 인구도 희박하다. 베레아의 동편에는 강대국인 나바테아(Nabatea) 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서편에는 요르단강과 사해가 있었다. 국경지대인 동편에는 군사요새가 매우 많았으니, 이곳에 거류하는 이들 다수는 안티파스의 용병들이었다. 한편 서편에는 광야수행자들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이스라엘 종교 전통에 깊은 신심을 가진 이들이었다.(1) 즉 베레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 중 다수는 대를 이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이 아니라, 마치 고속도로의 휴게소처럼 일시적으로 머물러 살면서, 전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자의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이런 장소의 성격을 ‘비장소’(non-pla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통상 장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전통이나 토착종교의 영향력이 약한 곳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에 관한 이론이다. 이를 베레아에 적용한다면 용병과 광야수행자가 이곳에 특별히 많고 그들이 그 지역뿐 아니라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 미치는 파급력을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갈릴래아는 두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장소는 갈릴래아의 ‘마을 회당’이고, 두 번째 장소는 갈릴래아 마을 밖 ‘호숫가’다. ‘마을회당’은 전통적 장소로서의 의미가 집적된 곳이다.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 대다수는 평생 마을밖을 떠날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은 조상의 전통 속에 살고 있다. 하여 그런 전통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질서는 일종의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질서를 신의 의지와 연결시키는 곳이 바로 마을회당이다. 이곳에서 하느님나라 운동을 벌였던 예수의 활동은 전통적 삶의 양식과 인습적 기억, 그것의 신적 해석체계에 대해 그이가 비판적 인식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회당의 지배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인 바리사이와의 충돌을 통해 예수운동의 특징이 구체화된다.
마을 밖 호숫가는 당시 갈릴래아의 전형적인 ‘비장소’에 속한다. 이곳에는 마을회당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들이 부유하는 물결처럼 떠다닌다. 몰락한 농민들, 질병과 악령에 들려 부정타게 하는 자로 낙인찍힌 이들, 그리고 상인들과 순례자들, 군인들, 세관원들, 매춘여성들이다. 〈마가복음〉은 이런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떠돌이들을 ‘오클로스’(οχλος)로 명명했다.(2) 오클로스와 예수의 만남, 그들의 상호관계가 예수운동의 특징을 이루게 되는데, 그런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 이야기가 바로 〈마가복음〉이다. 곧 이 복음서는 오클로스가 기억하는 예수전이다.
마지막 대중활동 거점은 예루살렘이다. 이제까지는 예수와 무관했던 곳이다. 단지 유토피아처럼 상상 속의 해방의 장소처럼 마음으로 간직했던 곳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곳을 해방의 중심지가 아니라 권력이 응축된 곳으로 보았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 그런 권력 자체였다. 해서 예수는 ‘아버지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일갈했다. 그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시스템의 근원적 해체 주장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예수 실천의 요체였다. 곧 예수는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토피아적 공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디스토피아적 공간에 다름 아님을 고발한다. 실은 이것은 그의 전임자이자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주장이기도 했다. 한데 광야에서 그런 주장을 편 요한과 달리 예수는 그곳으로 들어가 그 한가운데서 해체의 실천을 수행한다.
한데 이런 대중운동 거점들을 옮겨다니며 펼쳤던 예수운동의 주역들은 어떤 이들일까. 이 글은 바로 이들 예수운동의 주역에 주목해 보려 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떠돌이 예언자 집단이 그들이다. 성서는 이들을 ‘제자’라고 부른다.
제자들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마가복음〉 1,16~20
여기서 ‘버리다’(아피에미, αφιημι)와 ‘따르다’(아콜루쎄오, ακολουθεω)라는 두 동사가 주목된다.(3) 이 두 단어는 복음서에서 ‘제자’(마쎄테스, μαθητης)로 부름받은 이의 행위를 묘사하는 전형적 어휘다. 위의 인용구절에 나오는 네 명의 제자들이 그랬고, 세관원 레위의 이야기에도 이 단어들이 등장한다.(〈마가복음〉 2,14; 〈루가복음〉 5,28)(4)
아주 일찍부터 예수추종자들의 따름의 양식에 관한 용어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두 단어는 예수운동에 참여한 이들 중 ‘제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운동에 매진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돌아다니는 ‘떠돌이예언자’였다. 이것은 또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수많은 광야수행자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활동가들의 원조는 기원전 9세기 이스라엘국의 저항운동가이자 예언자인 엘리야다. 이 계보에 있는 이들 중에는 혁명가도 있었고 운둔수행자도 있었다. 또 수행자공동체 조직가도 있었다. 떠돌이예언자들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야에 대한 대중전승처럼(5) 그들은 당대 지배적인 종교정치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남자제자들과 여자제자들,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들은 예수와 함께 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루가복음〉, 이 세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제자 명단이 들어있다.
마가 3,16~19 | 시몬* | 야고보 | 요한 | 안드레 | 빌립 | 바돌로매 | 마태 | 도마 | 야고보^ | 다대오 | 시몬** | 유다## |
마태 10,2~4 | 시몬* | 안드레 | 야고보 | 요한 | 빌립 | 바돌로매 | 도마 | 마태 | 야고보 | 다대오 | 시몬** | 유다## |
루가 6,14~16 | 시몬* | 안드레 | 야고보 | 요한 | 빌립 | 바돌로매 | 마태 | 도마 | 야고보 | 시몬 | 유다# | 유다## |
※ 시몬* : 베드로로 알려진 시몬 / 시몬** : 열광자 시몬(‘젤롯당원 시몬’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젤롯당은 서기 66년 반로마항쟁 중에 등장한 정파로, 서기 30년대 초에 사망한 예수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다. 야고보^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이다. 유다# : 야고보의 아들 유다 / 유다## : 가룟 유다 |
이 명단은 모두 제자들의 숫자를 12명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름도 순서도 명단마다 거의 일치한다. 한데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 속에 한번도 나오지 않는 이들이 절반이 넘는다.(달리 표기된 인물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기억과는 별도로 명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명단에만 등장하는 이들 중 몇은 실제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명단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예수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희석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에서 꽤 영향력 있는 지도자 혹은 그이의 부친이나 조부였을 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예수의 제자일지도 모르는 이라 할지라도 훗날 그리스도 파의 주류집단에게서 배척된 이는 명단에서도 배제되었을 수 있다. 이것은 명단은 후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명단에서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다.(6) 또 ‘버리고 따르다’는 단어와 연결된, 거렁뱅이자 장애인이던 ‘티매오의 아들’로 불린 익명의 남자와 세관원 레위도 제자의 일원이었을 법한데 명단에는 없다. 그밖에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했던 몇 명의 여성들도 예수와 떠돌이 예언자 활동을 벌였던 제자단의 일원이었겠지만 그들도 명단에는 빠졌다.
사실 제자단의 수를 자연수 12명에 한정하는 것도 작위적이다. 분명 예수 제자단을 부르는 명칭의 하나가 ‘열둘’이었을 법 한데, 그것이 어느 시기에 12명의 제자단으로 명단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떠돌이’의 생활양식은 대단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해서 열두 명으로 고정된 제자단의 수를 유지하며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때는 더 많았을 수 있고 어떤 때는 훨씬 적었을 수도 있다. 유명하지 않았을 때는 적었겠고 유명해진 뒤에는 좀더 많았을 수 있다. 혹은 제자단 내의 갈등유무에 따라 숫자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서 여건이 좋은 국면에서는 그 수가 많았겠고 열악한 국면에선 더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마다 제자단의 수는 가변적이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제자단을 명단에 의거해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버리고 따름’이라는 떠돌이 예언자로서 예수와 함께 한 이들이 실제 제자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제자들 중에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마가복음〉 15,40~41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27,55
예수를 아는 사람들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들은, 다 멀찍이 서서 이 일을 지켜보았다.
―〈루가복음〉 23,49
이 구절들은 예수의 자자단 속에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했지만, 그리스도파의 기억에서 배제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이 벌인 결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대체불가의 역할을 수행했다. 예수가 처형당하던 때 남자 제자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그 현장에 있었다. 또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고를 처음 들은 이들은 그들이었다. 아니 부활사건을 기획하고 확산시킨 주역이 그들이었다.(7) 그 일로 인해 예수 메시아 설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예수 사후 예수운동이 되살아났으며 훗날 복음서들로 알려진 예수전도 만들어질 수 있었으며 헬라문화권으로 확산된 그리스도파의 운동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여성에 대한 비하의 문화 속에서 여성 제자들에 얽힌 다른 이야기들은 모두 망각되었겠지만,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은 너무나 유명해서 더 이상 삭제할 수 없는 기억 덩어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이 단락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떠돌이 예언자인 제자들은 12명에 한정되지 않았고, 여러 명의 여자 수행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이자 축귀자였다
그렇다면 그들과 그녀들은 역할이 달랐을까. 아래 구절은 예수와 제자단이 떠돌이 예언자로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마가복음〉 6,7~13
떠돌이 예언자는 가장 단촐한 차림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활동을 폈다. 가진 것 권력도 없어서겠지만, 동시에 가족도 재산도 포기한 유랑자의 삶의 양식은 자발적인 선택이자 의지로서 추구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는 축귀 행위가 빈벌했다.
그렇다면 여자제자들은 어땠을까? 여자축귀자는 복음서를 포함한 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구절에서 축귀행위를 남자에 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남자 제자들이 축귀행위자가 아니듯이 모든 여성제자도 축귀행위자는 아니었겠다. 동시에 남자든 여자든 일부는 축귀행위를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남자뿐 아니라 여자제자들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질서에 반하는, 권력의 질서를 추구하는 자들을 비판하며 그자들의 최후에 관한 예고를 설파하는 활동을 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햇듯이 여성제자들을 예수 이야기에서 배제했기에 ‘그녀들’의 예언자로서의 활약상을 직접적으로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여성 예언자들이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튿날 우리는 그 곳을 떠나서,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는 처녀 딸이 넷 있었다.
―〈사도행전〉 21,8~9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밀어 버린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5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미혹시켜서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다.
―〈묵시록〉 2,20
〈사도행전〉을 제외한 두 텍스트의 경우, 여자예언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여기에는 여자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사도행전〉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보를 만류하는 예언을 한 이가 빌립의 딸이자 여자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여기도 그녀들이 예언자임을 말하고 있음에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경고하는 예언을 한 이는 남자였다. 아캅보라는 남자 예언자가 그 말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느닷없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 말을 하게 한 것은 다분히 작위적이다. 흐름에 적합한 것은 그녀들이 그 예언을 했다는 것이겠다. 그럼에도 자연스런 흐름을 깨고서라도 중요한 예언의 역할을 남자에게 부여한 것은 필시 여성을 격하시키는 문화의 산물이겠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여성예언자가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그룹 내에서 실재했다는 사실이다. 하여 우리는 그들과 그녀들은 축귀자이고 예언자로서 예수의 운동에 동참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역자였다
한편 제자들도 예수처럼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로 활동했지만,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수행자로서 그이를 보좌하는 활동도 제자들의 일이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섬기다’라는 뜻의 디아코네오(διακονεω)다. 이 단어는 앞에서 인용한 〈마가복음〉 15,41처럼 ‘(여자들이) 시중들다’로 번역되어 마치 여성 특유의 돌봄활동과 관련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마가복음〉 1,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처럼 천사들의 역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가복음〉 10,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처럼 예수 자신의 역할도 이 단어로 쓰였다. 즉 디아코네오는 여성스러운 시중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나라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남자나 여자) 제자가 디아코네오 한다는 말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활동을 보좌하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운동에서 남자제자와 여자제자는 사역에 있어서 동등한 존재였다.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문헌 속에는 여자제자의 역할은 망각되거나 격하되곤 했다. 그것은 일상의 장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행위자일 수 없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길 수 없었던 흔적들을 통해 추론해보면 사역에서 남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단지 남자든 여자든 더 주도적 행위자가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이들이 ‘광야수행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공동선》 2020년 5+6월호에 실린 글 〈또 한 명의 광야 수행자, 같거나 다른〉에서 말했듯이 ‘광야’는 일상의 장소가 아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나는 앞에서 그런 장소를 ‘비장소’라고 개념화한 인류학적 용어로 해석한 바 있다. 비장소로서의 ‘광야’는 그렇게 인습적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기에 용이한 곳이다. 그렇다고 모든 광야활동가들이 성적 차별을 해체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예수운동은 그랬다. 남자든 여자든 예수운동에서는 차별이 없었다. 예수의 추종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갈라디아서〉 3,28)
그들은 성전체제를 해체하는 혁명가였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혁명의 퍼포먼스를 벌이는 주역이 되었다.(〈마가복음〉 11,15~19; 〈마태복음〉 21,12~17; 〈루가복음〉 19,45~48; 〈요한복음〉 2,13~22) 가령 환전상의 매대를 뒤엎어 버리는 퍼포먼스는 예수 개인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벌인 집단적 퍼포먼스였다. 그 의미는 성전을 수탈의 장소, 그런 장소적 질서가 마치 신의 질서인 양 정당화하고 있는 성전체제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집단적 퍼포먼스는 팔레스티나의 로마주둔군과 성전당국에게는 불온하지만 허용해 줄 만한 저항행위로 해석된 듯하다. 당국은, 명절 때는 크고 작은 불온한 사태들이 일어나곤 하지만 그것이 소요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데 치안의 목표를 두고 있었기에, 그런 사태에 일일이 끼어들어 제압하는 일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예수일행의 퍼포먼스는 불온하지만, 로마주둔군의 관점에서는 아직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이 혁명적 퍼포먼스에 여자제자들도 함께 했을까. 어떤 추정도 가능하다. 물론 완력이 중요한 행위에는 남자제자들이 더 주도적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부활사건을 주도한 이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끄는 여성 중심의 제자단이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난 이들 혁명가들의 활동에 남자나 여자제자들은 각기 중요한 행위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많은 대중은 예수와 제자들의 활약에서 신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
[주]
(1) 이런 관점에서 광야수행자 현상을 해석한 글로는 《공동선》 2020년 5+6월호에 게재된 나의 글 〈또 한 명의 광야 수행자, 같거나 다른〉을 참고.
(2) 〈마가복음〉 외에도 이 단어는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곳에선 그 용례가 떠돌이 대중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해서 영어성서나 한글성서는 ‘crowd’나 ‘무리’로 번역하여 성격이 모호한 대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3) 뒷부분의 ‘남겨두다’(아피에미, αφιημι)는 의미상 ‘버리다’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다”라는 어구도 제자의 따름을 의미하는 전형적 어구다.(〈마가복음〉 8,34; 〈마태복음〉 10,38; 〈루가복음〉 9,23; 14,27)
(5)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말라기서〉 4,5)
(6) 이 코너에 실린 나의 글 〈그녀를 기억한다는 것―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억전쟁〉(2021년 9+10)은 그녀가 예수의 가장 중요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지만, 훗날 그리스도파 주류집단에서 배척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7) 2020년 1+2월호에 실린 나의 글 〈막달라 마리아, 민중 메시아론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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