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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 평등한 포용주의에 관한 성서의 상상력

며칠 전, 아마도 개신교계의 밴댕이 아무개들이 나의 글에 대한 권리침해 신고를 또 했다. 몇번째인지 헤아리기도 귀찮을 정도다. [경향신문](2019 10 05)에 실렸던 컬럼 <사법개혁을 낙관하지만, 우려의 댓글을 달다>가 그 글이다. 오래된 것이고 실패한 칼럼이어서 굳이 페북이나 다른 sns 공간에 공개할 것까지는 못 되지만, 내용은 사법개혁에 대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그것을 반대하는 이른바 '반조국연대'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특히 여기에 한몫하고 있던 한기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이다.

한데 문재인 정부는 사법개혁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배신했다. 집권 말기에 가서야 누더기 같은 사법개혁을 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집권 기간 내내 인권 친화적인 개혁입법을 거의 하지 않았고, 몇 안 되는 개혁도 실제적으로 진척시키지 않았으니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전혀 아쉽지도 않다. 현재의 패악한 정부를 인권친화적 관점에서 견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 똑같은 자들이다. 그러니 차기에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여전히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 정권은 촛불에 대한 철저한 배신정부였다 

아무튼 나의 실패한 컬럼까지도 관심을 가져준 아무개들의 부지런한 정성이 가사하다. 물론 기계적인 것이겠지만. 어쨋든 나의 부끄러운 글을 다시 한번 읽게 해 주어 나를 돌아볼 기회가 되었으니 감사하기도 하다. 이미 노쇠한 글쟁이인 탓에 향후에 몇번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더 심사숙고하고 좀더 섬세하게 준비하며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글은 [공동선] 2022년 9+10월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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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에서 브엘세바까지

평등한 포용주의에 관한 성서의 상상력

 

 

하느님이 다윗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으로 삼으셔서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무엘기하3,10

 

 

통일신학의 전거인가

 

“‘에서 브엘세바까지”! 성서에 9번이나 나오는 이 표현은 모두 하느님이 다윗에게 준 나라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의 경계를 가리킨다. 한반도의 남과 북의 끝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표현법과 유사하다. 한데 단에서 브엘세바의 거리는 278km 정도다. 한라에서 백두까지의 거리가 969km이니 삼분의 일에도 훨씬 못미친다. 굳이 재보면 서울에서 경주까지 거리(276km)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이 다윗에게 주었다는 나라는 참 작다. 하지만 성서 속의 이 말속에는 저 멀리 북쪽까지 펼쳐진 나라라는 함의가 들어 있다. ‘그땐 대국이었어!’라는 회고의 감정이 담긴 표현이다.

그 넓은 땅을 하느님이 다윗에게 주었는데, 그의 아들 솔로몬과 손자 르호보암이 신실치 못해서 대부분의 땅을 잃어버리고 브엘세바에서 북쪽으로 불과 90km 정도에 불과한 작은 나라가 되었다고 성서는 이야기한다. 해서 이 성서 이야기는 당연히 하느님이 준 땅이 회복되는 날에 대한 꿈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스토리에서 갈라진 한반도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해서 한국교회는 이 이야기를 수없이 되뇌면서 통일의 꿈을 다져왔다. 한데 과연 그럴까. 성서의 이러한 영토적 서술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전거라고 해도 될까.

 

상상 속의 경계

 

다윗은 과연 이 정도를 병합한 통치자였을까. 사실 역사학자들 중에는 다윗이 실존인물인지조차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성서의 이야기들이 다윗 자신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억이 상상의 인물 다윗에게 투영된 것이라는 얘기다. 뒤에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꽤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다윗이라는 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학자로서 그가 어떤 이였는지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이 수도로 삼았다는 도성인 예루살렘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보자.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의 흔적 일부를 찾아냈다. 이것을 포함한 여러 고고학 자료들과 문헌자료들에 기반을 두고 다윗의 도성을 복원할 수 있다. 옆의 그림처럼 동쪽으로 키드론 계곡(Kidron Valley)과 서쪽으로 튀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 중앙계곡)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성이다.

크기는 4~5정도로,. 조선시대 경복궁(43)1/10에 불과했다. 인구도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 성을 학자들은 다윗의 도성(City of David)이라고 부르는데, 하지만 이때 다윗은 실존인물 다윗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다윗이 실재했다고 가정하고 성서에 묘사된 유다국의 왕조표에서 1대 다윗부터 13대 요담까지(1) 예루살렘 성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데 같은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20km쯤 떨어진 도시 므깃도(Megiddo)는 최소한 450필 정도나 되는 마굿간을 갖춘 군사도시다. 물론 예루살렘보다 몇배나 큰 규모의 도시다. 성서는 솔로몬이 건설한 요새라고 하는데, 다윗성이라는 작은 도성을 보유한 나라의 통치자가 몇배나 큰 군사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랬다면 므깃도를 장악한 군사지도자는 왕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보유했을 것이다. 동시대에 그런 정도의 요새도시를 보유한 통치자는 이스라엘국의 아합밖에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아시리아 통치자가 세운 비석에는 아합의 군대가 1천대나 되는 마전차를 보유했다고 한다. 해서 학자들은 므깃도는 아합 치하의 이스라엘국의 요새로 건설되었다고 추정한다.

한데 성서를 잘 살펴보면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문구는 요시야 왕실 사관들의 문서들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인용한 성서구절이 그런 대표적인 문구다. 요시야는 18대 통치자인데, 그로부터 거꾸로 올라가서 아몬(17), 므낫세(16), 히스기야(15), 아하스(14), 이 다섯 명의 군주 시절 유다는 갑자기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 도성의 크기가 12~15배 가량 커졌고, 인구도 15배 이상 증가했다. 또 서쪽으로 블레셋의 영토였던 쉐펠라지역이 유다에 복속되어 비로소 유다는 평야지대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북쪽으로도 조금 더 영토가 확장되어, 국경지대였던 과거 베냐민 부족의 땅이 유다 영토로 편입되었다. 물론 북쪽 끝이라는 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까 요시야 왕 시절에도 단에서 브엘세바는 현실과는 너무나 먼 상상 속의 경계인 것이다.

 

평등한 포용국가적 상상력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요시야 왕실은 왜 이런 영토적 상상을 폈을까? 복잡한 얘기는 생략하고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유다와 이스라엘은 요시야 이전까지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조차 없었던 별개의 국가였다. 그리고 요시야 왕 당시 이스라엘국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뒤였다. 예루살렘과 유다에 인구가 증가한 것은 이스라엘 등 주변국들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면서 전쟁 난민의 일부가 유다로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블레셋이 멸망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셰펠라 평야도 유다 영토가 될 수 있었다. 유다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은, 그 땅이 아시리아군의 최종 목적지인 이집트로 가는 도로망에서 벗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측면에서 아시리아군을 공격할 만큼의 존재감 있는 국가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발빠르게 아시리아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덕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유다는 역사상 처음으로 번영기를 맞이한다.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그들로 인해 미개간지가 개척된 덕이다. 또 경쟁국들이 궤멸된 덕에 영토가 확장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한편 앗시리아 치하에서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하류지역에서 이집트까지, 그리고 지중해 서쪽 끝의 스페인을 연결하는 거대한 국제교역망이 가설되자 유다는 올리브산지로 부상했고, 그것이 유다를 아시리아 중심의 국제시장 네트워크 속에 편입되는 기회를 주었고, 그것으로 유다는 한층 번창했다.

한데 이 시기 유다국 조정은 크게 두 당파로 나뉘어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하나는 귀족 중심의 당파고 다른 하나는 왕실과 평민 당파다. 귀족은 난민을 노예로 삼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왕실은 그들을 백성으로 포용해서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요시야는 후자, 곧 난민 포용론을 편 당파의 통치자였다.

요시야 왕실은 이스라엘이 원래 한 혈통에서 떨어져 나간 나라였으니 그들이 비록 전쟁난민으로 떠돌이처럼 유입되어 들어왔더라도 백성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여 그들은 귀족의 노예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동족으로 간주하는 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귀족당파에 예속된 노예들을 방면하는 정치사회적 압박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것은 귀족당파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아무튼 이것은,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만들자는 통일의 메시지라기보다는, 국경을 넘어 대거 유입되어 들어온 난민 포용론을 의미하며, 난민 유입으로 인해 부유해진 조정의 특권세력이 부를 축적하면서 자국 농민이 예속화되는 경향을 억제하는 사회적 평등론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요시야 왕실은 정체세력으로 부상한 농민세력(암하아레츠)이 한 축을 형성한 진보적 개혁 정권이었다. 바로 그들에 의한 평등한 포용국가적 비전이 바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영토적 상상력의 배후였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세계, ‘단에서 브엘세바’에는 어떤 비전이 담겨 있을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를 진단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이 세계화의 결정적인 퇴조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전쟁으로 자원의 글로벌공급망(global supply network)이 교란되었고, 향후에도 별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면 세계화의 폐해가 너무나 극심해져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양극화가 극도로 심화되었기 때문이고, 코로나 팬데믹 등 대규모 감염사태나 초대형 기후재앙 등도 세계화의 폐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미 중병을 앓고 있고, 그것이 곳곳에서 극악한 정치재난으로 터져나오고 있는데, 그 정점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 두 나라의 국경지대인 돈바스 지역에서는 여러 형태의 혐오주의가 잔인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데 그 증오의 정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라는 동슬라브 족속 내 국가들의 혐오주의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곳으로 유럽 각 지역, 중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각 지역의 혐오주의자들이, 혹은 여러 종교적 혐오주의자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와 갈등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위험하거나 무모한 통치자들의 야욕과 읽히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전쟁을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신냉전체제로 구현하고자 했고, 한국과 일본, 대만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적극 동참하면서 냉전은 점점 더 깊고 사나운 소용돌이 속으로 전 세계를 휘말려들게 하고 있는 중이다.

세계화의 위기를 일부 국가들의 정치세력들은 냉전의 부활 및 강화로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냉전은 국가들만의 수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온갖 혐오주의가 사회 곳곳에서 확산되고 그것을 냉전이라는 거대한 혐오의 장벽과 연루시키려는 음모들이 여기저기서 기획되고 있다.

세계화가 만들어 놓은 숨 막히는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공격성을 자라나게 하는 모태와도 같다. 여기에 누군가가 불을 지른다. 분노를 부추기는 자들에게 충동질된 이들이 서로 공격하면서 사회 집단들 간에 갈등의 골이 극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일촉즉발의 폭력적 상황에 가장 무방비하게 놓인 이들이 등장한다. 그런 이들을 통상 희생양이라고 부른다. 양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이들이다. 가령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성소수자들은 갈등 당사자들 양편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을 향한 공격이 격화되었고, 그곳을 떠나 난민이 된 이들은 다시 환대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폭력에 대해 고발했던 그 많던 방송과 유튜버들의 눈에도 그들은 대부분 포착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세계 각 지역에서 격화된 갈등 상황에서 여러 희생양들이 발굴되어 낙인찍혔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냉전체제를 강화하는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을 때, 희생양에 대한 낙인찍기와 공격성은 극도로 강화되기 마련이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를 주장한 성서 텍스트는 모든 난민들을 끌어안는, 무차별 낙인찍기의 희생양이 된 이들을 품는 평등한 포용사회를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들을 난민으로 만들고 있을까. 거주할 곳을 빼앗인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있을까. 더럽고 불결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해서, 생각하기조차 싫은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런 이들과 우리가 행사하는 사회적 권리를 공유할 수 있을까.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또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될까.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서는 안 될까. 그리고 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혐오를 부추기고 공격과 파괴가 점점 더 일상이 되어가는 사회에서 공공의 적이 된 이들을 말이다.

 

 

[후주]

(1) 성서에 의하면 유다국의 통치자는 총 22명이다. 이것은 아달랴(공동번역성서에는 아달리야’)를 포함한 숫자다. 그녀는 이스라엘국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 유다국 5대 군주인 여호람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유다국은 이스라엘국의 봉신국이었다. 한데 그녀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라엘국에서 일어난 예후의 쿠데타 때에 불의의 죽임을 당하게 되자, 그 비상시국에 정권을 장악하여 4년간 통치자로 군림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