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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6) - 언택트 시대 계급적 경계짓기, 성공의 위기

[가톨릭평론] (2022.가을호)에 실린 글. '언택트시대 한국개신교'라는 주제로 연재된 마지막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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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 계급적 경계짓기, 성공의 위기

 

 

 

2021년 봄호부터 시작된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는 이번 글을 끝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애초에는 4회로 기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언급하지도 못한 채 마감하기가 못내 아쉬워하던 차에 편집진이 먼저 제안해 준 덕에 두 번을 더 쓰기로 했다. 물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만일 조금 더 쓰겠다고 하면 관대한 편집진은 내게 더 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연재 도중에 불쑥 찾아온 마음의 질환이 나의 정신의 집중력을 한껏 흩뜨려버렸다. 두 번이나 약속된 원고를 펑크내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제는 마음의 질병이 거의 회복되었지만 그새 2년이나 끌어왔던 것이니 더 이상 계속한다는 건 독자에게 큰 결례일 것이다.

 

언택트

 

인터넷과 디지털테크널리지의 빠른 발전,(1) 그리고 에이아이(AI, Artificial Intelligence)나 빅데이터 등의 정보기술의 고도화,(2) 이러한 요인들은 세계를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 변화를 읽어내는 핵심 키워드의 하나는 유동성(mobility)이다. 과거에는 막대한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힘의 근원이었다. 저장능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분류체계를 표준화하고 각 영역을 전담하는 전문가의 양성이 중요했다. 한데 오늘날은 온오프라인 공간 속에서 유동하는 지식과 정보가 무한히 발굴되고 있다. 하여 어마무시하게 많은 정보들을 담아둘 만큼의 거대한 저장고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그 정보들은 너무나 유동적이어서 질서정연한 저장고 속에,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가지런히 안착해 있질 않는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서로 엉키고 설킨다. 그리고는 매듭이 풀리듯 풀어졌다가 다른 것들과 새롭게 엉킨다. 그런 일이 무한이 벌어지는 곳이 정보의 바다. 바로 이런 현상을 함축하는 개념이 유동성이다.

이런 사회에서 요구되는 전문가의 능력은 특정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경계가 어디인지를 알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는 온오프라인 공간을 흘러 다니는 무한히 많은 정보 중 필요한 것을 빨리 찾고 먼저 활용하는 자다.

또한 산업화 시대는 동선의 최소화(minimizing movement)를 구현하는 시스템이 중요했다. 가령, 공장의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분업화된 공간에서 노동자는 거의 한곳에서 한 가지 작업만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동료 간의 협력이다. 하지만 유동성의 시대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여 동선의 최소화보다는 확장된 공간의 활용이 더욱 중요하다. 심지어 온라인공간에서 시공간의 체험은 빛의 속도만큼 거리감을 줄일 수 있었다. 공간사회학자인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이런 변화를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이라는 개념어로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사회에서 동료들의 협력은 더 이상 유용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기계와의 협력, 특히 컴퓨터나 에이아이와의 협력이 더 중요해졌다. 아니 협력이라기보다는 (인간-기계의) 혼융화(hybridization)가 필요하다. 마치 스마트워치처럼 몸의 일부가 된 기계를 통해 자신의 건강도 체크하고 집안 관리도 하며 국제거래까지 한다.

이런 유동성 개념과 맞물리며 새롭게 부상한 개념 중 하나가 언택트(untact). 과거에는 동료들과 컨택트(contect)에 서투른 이가 있으면, 그이는 사회성이 부족한 자로 간주되었다. 나아가 사회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자는 사회적 연결망에서 퇴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동성의 시대에는 (컨택트가 아닌) 언택트가 존재 평가의 새로운 규준(new nomal)으로 부상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료와의 협력에 서툴러도 그것만으로 심각한 결핍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그이가 기계와의 혼융화에 더 성공적인 자라면, 사회성이 약하더라도 훨씬 더 필요한 이로 간주된다. 이때 기계와의 혼융화란 기계와의 컨택트에 성공적인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혼융화는 주로 온라인공간을 매개로 할 때 더 폭발적으로 효능감이 높아진다. 해서 언택트를 온택트(ontect, on+untac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2019년 말, 느닷없이 미지의 바이러스인 코로나19(COVID-19)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세계는 순식간에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그렇게 2년을 보낸 뒤에 세계는 코로나19와의 전면전의 시대에서 공존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이른바 위드코로나(with-corona)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전면전을 벌였던 그 2년의 시간에 언택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규준이 되었다.

유동성의 시대로 이행하는 거대한 변화(mega-transformtion)의 와중에서 성공의 기회를 얻게 된 이들과 실패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한데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미친 듯이 활개치던 코로나19의 그 2년 동안 성공한 이들과 실패한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각기 어떻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었을까. ‘코로나19의 시간을 연구하고자 할 때 꼭 살펴보아야 하는 주제다.

이중 이 연재는 한국개신교에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시간, 그러니까 언택트의 규준이 활개치고 있을 때 개신교의 성공한 교회들과 실패한 교회 및 단체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묻고자 했다. 특히 실패한 분파들의 행보에 주목했다. 그들은 언택트의 규준에 동의했던 시민사회와 격렬한 갈등을 일으켰고, 그 결과 코로나19의 슈퍼감염자로서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 자로 낙인찍혔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의 글은 바로 실패한 분파들(3)의 행동들을 살펴보고,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분석해보았다. 간략히 정리하면 그것은 실패의 위기를 성찰하지 못한 퇴행적 대응이었다. 하여 실패를 발판 삼아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켰다. 시민사회는 개신교를 문제적 종교로 낙인찍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글은 성공한 교회들에 관한 것이다.

 

성공신화의 감정동학

 

산업화 시대에서 유동성의 시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한국개신교에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4) 초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개신교 교세가 정체되었고, 빠른 성장을 구가한 끝에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이 꽤 많았다. 이 둘을 종합하면, 교회에서 이탈하여 떠돌이가 된 신자들을 대거 흡수한 다수의 교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렇게 양적인 성장을 이룩한 교회를 나는 이 연재에서 후발대형교회라고 부른 바 있다.

유동성의 시대에 왜 급성장하던 개신교가 정체기를 맞아야 했을까. 또한 그 와중에서 일부 교회들(후발대형교회)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의 성격과 교회의 성공 사이에는 어떤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을까.

대성장의 시대에 교회들은 담임목사의 스킨십(컨택트)을 중요한 종교장치로 활용했다. 신자들은 매일 종교의 공간인 교회에 가는 것을 신실한 신앙인의 기본처럼 받아들였고, 목사는 신자의 일상 공간인 집으로 찾아가는 심방(尋訪)을 사역자의 기본으로 여겼다. 한데 유동성 시대의 교회들은 집회 숫자도 줄었고 출석률도 낮아졌다. 또 목사들은 신청자의 집만을 심방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대신 목사들은 영상을 통해 혹은 목소리를 통해 신자와 연결되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반드시 성직자를 매개로 하지 않아도 되는 신자들의 네트워크 활동이 훨씬 활발해졌다.

유동성 시대에 교회는 일종의 종교복합몰(complex mall as religious places)처럼 건축되었다. 여기에는 종교상품뿐 아니라 신자의 삶의 이야기들과 사적 욕구와 취향을 담아내는 다양한 공간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모든 것의 중심인 권위주의적 리더십보다는 신자 네트워크의 다양성을 모자이크처럼 엮어내는 매개적 리더십(mediator leadership)이 목사에게 요구되었다.

오랫동안 신자였던 교회에서 탈주한 이들 다수가 이런 유형의 교회로 찾아와 재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신의 다양한 요구와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교회들에 비하면 훨씬 더 다양성을 포용하고 탈권위적인 교회들은 이렇게 유동성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했다.(5)

그렇다면 유동성 시대에 후발대형교회에 모여든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목사만을 바라보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자들은 이런 교회들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 반면 목사에게 자신을 전부 위탁하고 싶지 않은 이들 중에는 불만을 품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교회들을 기웃거리다가 자신의 기호와 취향이 점차 분명해지는 것을 체감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을 어느 정도 담아낼 것 같다고 생각되는 교회에 재정착했다. 그렇다면 유동성 시대에 이탈과 재정착을 한 신자들은 자존성이 강하고 권리의식에 더 민감한 이들이겠다. 실제로 후발대형교회들에는 학력 높고 자산도 더 많으며 상징권력을 더 많이 갖춘 이들로 들끓었다. 즉 이런 교회들은 계층별 다양성이 낮고 특정 계층, 즉 중상위계층 중심성이 높다. 또 계층 내의 기호와 취향을 매우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종교적 장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교회들은 중상위계층 중심의 문화적 실천의 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정 계층이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추구하는 행동을 하면 다른 계층은 그 계층에 대해 경쟁심을 갖게 된다. 나아가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면 적대감으로도 나타난다. 반면 그것이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나면 다른 계층은 그 계층의 문화를 선망하게 된다. 해서 이 시기에 성공하지 못한 교회들은 성공한 교회들을 선망하며 모방하려 한다. 이때 성공신화가 탄생한다. 많은 교회들은 성공신화를 모방하면 자기도 성공의 대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공신화는 성공하지 못하는 다수가 있어야 진정한 성공신화가 된다. 즉 실패자의 열패감을 먹으면서 성공신화 담론은 유효하게 작동되는 것이다. 교회의 성공신화도 그렇다. 교회의 성공신화는 많은 실패한 교회들의 선망과 모방, 그리고 열패감이 성공신화 주변에서 작동되는 감정동학이다.

 

성공의 위기

 

사실 성공신화는 그 성공의 비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은 그 성공신화를 비법처럼 믿는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실패한 많은 교회들은 열렬히 모방했음에도 위기에서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 많은 신자들이 이탈했다. 하지만 이탈한 이들 중에 성공한 교회들로 진입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 말했듯이 그 교회들은 중상위계층 중심의 문화적 실천으로 가득했다. 하여 많은 이들은 그 계층적 경계짓기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만다.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권위주의적 목회자를 필요로 하고, 은사주의적 축복에 더 의존적인 이들이다. 유동성 시대의 성공신화, 그 포섭과 배제의 감정동학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존성이 훼손되어 의존적 성향이 강화된 탓이겠다. 한데 그들은 자신이 속했던 교회의 성공신화 따라하기 과정에서 한때 자신들에게 행복을 주었던 축복의 신앙이 변질되었음을 직감했다. 해서 실패한 자들이 모이는 또 다른 장소들이 탄생했다. 신천지 종단의 교회들이 그랬고, 태극기 전사들이 모이는 광장이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신화 자체를 문제제기할 능력이 없었다. 성공신화의 문제가 계층의 문화적 실천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들의 신앙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계층의 문제를 해석할 언어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여 위기에 대하는 그들의 대안적 행동은 늘 빗나갔다. 그것은 그들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더욱 외면당하고 심지어 사회적 반감을 한 몸에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했다. 사회는 그들의 대안적 행동을 퇴행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결국 성공신화는 실패한 개신교 분파들에게 더욱 심각한 위기로 돌아왔다. 또한 그것은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개신교 전체에 대한 부정적 평판으로 이어지게 했다. 결국 개신교의 성공신화는 성공의 위기인 셈이다.

 

마지막 기회의 시간

 

코로나19의 시간에 정부는 언택트의 사회적 실천을 사회적 거리두기로 해석하여 적용했다. 하지만 급박하게 닥쳐온 재앙에 신속하게 대응하다 보니 그 조치는 적잖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해서 공론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부만큼이나 시민사회도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압도적인 다수가 정부의 조치를 지지했고, 그것이 실패자에게 혹독한 재앙으로 체감될 때에야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나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실패자의 목소리만이 공론장에 반대의견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적잖은 언더클래스(under-class)의 소리는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망각했다. 한편 매스미디어는 공론장에 올라온 반대 주장들을 정쟁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증폭시키는 일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공론장은 오염되어 소통의 장이 아니라 정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한편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대해 시민사회가 거의 맹목적으로 지지를 표할 때 일부 개신교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강력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질렀다. 교회가 워낙 빅스피커 역할을 해온 강력한 사회적 압력단체였기에 무수한 매스미디어들은 교회의 반대 주장을 공론장에 올려서 토론하는 기회를 만드는 일이 잦았다. 만약 이때 교회가 시민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좀더 공공적 관점으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는 첫 번째 기회의 시간을 헛되게 날려버렸다.

그동안 많은 신자들이 참여해왔던 취약계층에 대한 돌봄활동이 정부의 섬세하지 못한 조치로 인해 중대한 타격을 받고 있음을 교회가 강조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한데 교회는 돌봄선교가 중단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제기하지 않았고, 단지 대면예배를 고수하겠다는 주장만 반복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이런 주장은 신자들의 사회적 공공의식의 퇴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정부와 시민사회도 교회와의 퇴행적 논쟁의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그 기회를 잃어버린 결과는 참담했다. 개신교 교회는 고립되었고, 사회는 성공한 자들과 실패한 자들의 정쟁뿐인 오염된 공론장을 개선하지 못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훨씬 더 무감각한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세계는 혹독한 재앙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경고를 수없이 발화하고 있는데, 정부는 매우 무능한 모습을 국민에게 들켜버렸다. 이럴 때 재앙이 닥친다면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열악한 위치의 약자들이다.

한데 이것은 교회에게는 두 번째 기회의 시간일 수 있다. 모두가 언택드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산에 열을 올릴 때, 목소리를 낼 능력이 없는 이들의 입이 되고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손과 발이 되는 것, 그동안 교회가 간간이 해왔던 그것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거리두기 논쟁이 한창일 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신자들의 돌봄활동 조직이 붕괴되었다. 지금 그것을 복원하고 활동을 재개하며, 공론장에 올려서 정부와 시민사회와 대화를 시작하는 것, 이것이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가 의미 있는 종교로 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후주]

(1) 흔히 이러한 인터넷과 디지털화와 관련된 산업을 3차산업이라고 부른다.

(2) 흔히 이러한 정보기술과 관련된 산업은 4차산업이라고 부른다.

(3) 개신교계 소종파인 신천지, 거리의 태극기우파, 소형교회들, 개신교계 극우NGO .

(4) 1990년대부터 이러한 이행의 시간이 펼쳐졌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행의 시기는 2천년대 어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시간은 본격적인 이행의 시간을 급격히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5) 하지만 동시대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 비교하면 더 획일적이고 더 권위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