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울림] 2022년 10월호에 실린 글. 통권59를 내기까지 거의 빠짐없이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이 글을 마지막으로 [맘울림]과의 글쓰기 인연을 마무리하려 한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속간행물을 내온 신앙인아카데미 운영진에 경의를 표한다. 비록 내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는 건 이번으로 끝내게 되었지만, 신앙인아카데미가 언제나처럼 빛나는 단체로 살아있기를 바란다. 이 모임에서 만만 아름다운 사람들은 내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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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잔인해질 때
피투성이 남자는 쇠사슬이 묶인 채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이리저리 난폭하게 끌려다녔다. 살기등등한 병사들이 도열한 광장에 이르자 또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상처투성이인 몸둥이에 잔인한 채찍질이 이어졌다. 살갗이 터지고 절규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핏물이 허공을 갈랐다. 죽을 듯 고성을 지르던 남자의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고문집행관이 축 늘어진 머리에 찬물을 퍼부었다. 가늘게 뜨인 눈을 확인하자 다시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상체를 벗은 집행관의 몸둥이, 팔뚝, 얼굴은 사정없이 튀어버린 핏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마치 지옥의 사자 같았다. 형틀에 묶인 남자의 몸둥이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헤어졌다. 얼마 후 그는 더 이상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집행관이 째질 듯 소리쳤다. 그 소리를 그대로, 전령이 백성을 향해 고함쳐 전달했다. 백성들은 수근대며 어떤 이는 크게 어떤 이는 나지막하게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군대의 트럼펫이 울렸고, 고수들은 미친 듯이 북을 두드렸다. 온 도시는 이렇게 그의 죽음 소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집행관들은 그의 목을 잘라 성문에 걸어놓고 시신은 키드론 골짜기에 내던져버렸다.
여호야김 왕이 즉위한 지 몇 달이 안 된 시기에 벌어졌던 한 사건이다. 그 몇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선왕 요시야는 법을 반포하면서 백성을, 노예와 떠돌이 식객까지 법을 반포하는 광장으로 불러모았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은 누구도 법이 허용하는 기본적 존엄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선포겠다.
(1)이것은, 주님께서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에 덧붙여서, 모세에게 명하여,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다. (2)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10)오늘 당신들은,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관리들을 비롯하여, 온 이스라엘 사람, (11)곧 당신들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들과 당신들의 진 가운데서 함께 사는 외국 사람과 당신들에게 장작을 패 주는 사람과, 나아가서는 물을 길어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모두 모였습니다. (13)주님께서 당신들에게 약속하시고, 당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당신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주님께서 몸소 당신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입니다. (14)이 언약과 맹세는 주님께서 당신들하고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29,1~14
한데 새 왕은 불과 몇 달 만에 선왕인 부친의 뜻을 거스르며 마치 법이 없는 나라의 통치자처럼 한껏 권력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퍼포먼스 하듯 널리 알리려 안달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몇 달 만에 어떤 권력의 위기라도 온 것일까.
우리가 사용하는 연도표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아마도 여호야김이 즉위한 기원전 609년 9월부터 이듬해 초 사이에 발생했다. 처형당한 이는 우리야(Uriah)라는 이름의 사람인데,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야훼의 예언자를 참칭하여 왕을 비방하고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을 호도하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단 네 개의 절(26,20~23)로 압축되어 묘사된 내용에 따르면, 검거령이 내리자 우리야는 이집트로 도주했고, 왕이 파견한 관리에 의해 압송되어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20)그 당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21)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자기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과 함께 그의 말을 들은 뒤에, 그를 직접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22)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몇 사람의 수행원을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23)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묘지에 던졌다.
여기서 이집트 운운하는 얘기를 표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모세가 연상된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던 대중이 그 사건을 회고하는 특별한 기억법이 이런 설화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대중이 ‘제2의 모세’를 잔혹하게 처형한 왕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모세 설화에 의하면 영웅 모세에 반기를 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징벌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왕도 하느님의 그런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반체제적 비판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대중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훗날 예레미야 예언자의 신탁집을 만들던 일부 지식인 집단에게 수집되어 간략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 그가 선포했다는 ‘재앙’에 관한 신탁에 주목해 보자. 말했듯이 이때는 여호야김 왕이 즉위한 직후다. 당시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했던 시기다. 결과만 간략히 말하면, 요시야 왕 시대에 왕국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는데, 몰락하고 있던 아시리아 제국의 동맹자인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네코 2세)가 신흥 제국 바벨로니아에 맞서기 위해 북시리아 지역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그 길목에 있는, 바벨로니아 동맹국인 유다의 왕 요시야가 변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집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느고에 의해 소환되어 처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느고는 죽은 요시야의 아들 중 이집트-아시리아에 우호적 가문과 연결된 여호야김을 새왕으로 즉위하게 했다. 아마도 느고가 유다국 내의 정쟁에 대해 소상히 알 수는 없었을 테니, 그가 여호야김을 즉위시켰다기보다는 유다국의 반요시야 세력이 느고를 지지하면서 느고의 승인을 받아 정권을 잡게 된 것이라는 보는 게 더 적절한 이해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런데 새 정권은 처음부터, 국제정치로 인해 위기에 빠진 국가를 회복하려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요시야의 실패를 부각시키는 정치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예레미야서〉 곳곳에서 엿보이는 통치자 여호야김의 모습은 무능함과 무지함, 원칙 없이 오락가락하는 변덕으로 점철되어 있다.
시간을 좀더 앞으로 돌려보자. 100년 남짓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상 최초의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던 유다국을 볼 수 있다. 그때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많은 나라들이 사라졌다. 특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패권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람국이 멸망했다.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국 전 영토의 70% 이상이 파괴되었다. 무수한 난민이 전란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로 남쪽에 있는 유다국에도 많은 전쟁 유민들이 몰려 내려왔다. 유다는 이집트로 향하는 해안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황량한 산간지역에 있었기에 아시리아군의 관심거리가 전혀 아니었다. 해서 유다국은 상대적으로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갑자기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 인구가 열 배 이상 증가했다. 농경지라곤 거의 없는 산간지대에 입지한 탓에 인구가 희박한 나라였기에 인구의 증가는 산지농경지의 증가로 이어졌다. 당시 유다국 군주는 아하스 왕이었는데, 그는 이들 유민들의 상당수를 왕실노예로 삼았다. 이로 인해 왕실의 부가 급증했다. 이는 국가의 국력이 빠르게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것이 위기의 요인도 되었다. 창고가 가득 채워진 것은 왕실만이 아니었다. 많은 유민들은 귀족들의 곳간도 가득 채우는 농노가 되었다. 그리고 아하스 왕실은 좀더 복잡한 국가제도를 발전시켰다. 이는 지방 토호인 귀족가문이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관료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유다국 조정 내에서 정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이 다섯 명의 군주가 유다국의 전성시대의 군주다. 한데 궁중모반으로 즉위한 직후 살해당한 아몬을 제외한 네 명의 군주 중 아하스, 므낫세는 귀족 중심의 정치를, 히스기야, 요시야는 대중을 중요한 정치의 파트너로 삼는 친서민적 개혁정치를 폈다. 귀족파와 서민파의 권력투쟁은 팽팽했다. 해서 새 군주가 즉위할 때마다 다른 정파가 집권세력이 되었다.
요시야는 친서민 정치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를 승계한 여호야김은 철저히 부친의 정치에 반하는 정치를 폈다. 문제는 히스기야를 승계한 므낫세 시대에는 번영을 구가했지만, 비슷한 정파의 지지를 받는 여호야김은, 말했듯이, 무능했고 무지했으며 변덕스러웠다. 그것은 불과 몇 달 만에 백성에게 들켜버렸다. 이에 왕이 택한 정치는 잔인한 응징의 정치였다. 우리야 처형이 그 대표적 사건이다.
이후 유다국은 몰락을 거듭했고, 불과 이십 년 남짓 지나서 역사에서 처참하게 사라졌다. 백성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 고통스런 시간을 맞아야 했다. 우리야 처형 사건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서〉는 바로 그 고통과 능욕의 시간을 백성과 함께 겪었던 지도자 예레미야의 신탁들을 담고 있다.
권력이 잔인해질 때, 그때는 대개 권력이 가장 수치스러운 정치에 몰두하고 그것이 백성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들켜버릴 때다. 문제는 그것이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그 땅의 모든 대중에게 재앙으로 닥쳐온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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