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2022 07+08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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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예언자와 지역협력자
예수운동 활동가의 두 범주
“내 뒤를 따르라” + “버리고 따랐다”
예수는 어떤 이를 제자로 부를 때 ‘듀테 오피소 무’(Δευτε οπισω μοη) 혹은 ‘아콜류쎄이 모이’(Ακολουθει μοι)라고 말했다.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나를 따르라’라는 뜻이다. 이 부름을 받은 이는 놀랍게도 자신의 것을 ‘버리고 따랐다’(아피에미 카이 아콜류쎄오, αφιημι και ακολουθεω)고 한다. 낯선 이가 와서 다짜고짜 자기를 따르라고 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랐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은 그들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런 추정이 허황된 상상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요한의 말을 듣고는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1,35~42) 이 말은 흥미롭다. 이 복음서의 수신자들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의 제자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데 복음서는 그들이 원래는 요한의 추종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요한의 추종자인 베드로와 안드레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 일말의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실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해진다.
알다시피 예수 자신도 요한의 추종자였다. 예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 유명한 예언자를 찾아 요르단 강가로 찾아왔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뒤 그곳 광야에서 예언자 운동원이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중앙집중적이든 분산적이든 어떻게든 그루핑되고 있었을 것이다. 동향 사람들끼리 엮이기도 했고, 생각이 비슷한 이들끼리 엮이기도 했겠다. 그리고 각 그룹마다 리더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 중에는 요한에게 인정받은 이도 있을 것이고 아직 그와의 연계가 긴밀하지 않은 이도 있었겠다. 예수는 꽤 중요한 측근이었을 것이다. 위의 〈요한복음〉 텍스트에서 예수를 지목하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다”(1,36)라고 했다는 요한의 말이나 복음서 여기저기에 산개해 있는 요한이 예수를 높이 평가한 듯한 표현들은 요한이 예수를 굉장히 중요한 측근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 나의 추정에 의하면, 요한이 주도했던 예언자운동에는 수많은 소그룹들이 있었고 그 중 예수가 이끄는 소그룹에는 베드로와 안드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운동의 본거지인 베레아 지역의 통치자 안티파스의 부대가 요한이 이끄는 예언자운동 집회 현장을 덮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수한 이들이 군인들의 창에 쓰러졌다. 그리고 지도자 요한이 체포되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예수도 긴급히 그곳을 피해 갈릴래아로 갔다. 한데 그는 고향 나사렛으로 간 게 아니라 저 북쪽의 낯선 고을 가버나움으로 갔다. 아무리 보아도 그런 행보는 옛 동지인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들을 포함해서 흩어진 옛 동지들을 재결속시키고 새 동지들을 만들기 위함이다. 하여 요한이 이루지 못한 운동을 이어가고 완성하기 위함이다. 그 첫 행보가 바로 이 대목,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말한 그것 속에 함축되어 있다. 얼마 안 가 안티파스 당국은 처형한 요한이 되살아나 다시 준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마가복음〉 6,14)
하지만 예수의 부름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두말없이 따랐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름과 따름’에 관한 제자도의 전형처럼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때 그 제자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단어가 ‘따르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아콜류쎄오’(ακολουθεω)다. 하지만 이 단어가 제자도의 전형으로 사용되려면 ‘부름’의 말이 함께 나와야 했다. 아래 인용구절은 부름의 말과 ‘버리고 따름’이라는 추종 양식을 나타내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따르다’는 뜻의 동사 ‘아콜류쎄오’가 어떻게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4)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Ακολουθει μοι)”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갔다(에콜류쎄센, ηκολουθησεν). (15)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따라왔던 것이다(에콜류순 아우도, ηκολουθουν αυτω).
―〈마가복음〉 2,14~15
14절에서 예수는 레위에게 ‘아콜류쎄이 모이’, 즉 제자가 되라고 호출했고, 레위는 즉시 ‘일어나 그이를 따랐다’. ‘일어나다’는 뜻의 그리스어 ‘아나스타스’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가까스로 잡은 직장인 세관원을 포기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즉 14절에서의 ‘따르다’는 예수의 부름의 말과 ‘버리고 따름’이라는 제자의 추종 양식의 표현과 결합되어 있어, 전형적 제자됨의 어법에 따르고 있다. 반면 15절의 ‘따르다’는 레위의 동료와 이웃들이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에게 매료되었다는 함의를 갖고 있다. 하여 그들이 예수의 편에 선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따르다’로 표현한 것이다.
제자됨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단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두 사람이 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디메오(티메오)의 아들’이 그들이다. 길지만 두 구절을 인용해보자.
(17)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46)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48)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49)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50)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51)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2)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첫 번째 인용문인 〈마가복음〉 10,17~22은 예수와 어느 부자인 청년과의 대화 부분이고, 10,46~52는 시각장애인이던 어떤 거렁뱅이와 예수의 대화를 다루고 있다.
먼저 첫 번째 인용문을 보자. 어떤 젊은이가, 그는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인데, 예수에게 찾아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는데,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한다. 그런 뒤에나 ‘나를 따르라’(아콜류쎄이 무, ακολουθει μοι)고 말한다. 즉 그 청년이 예수에게 말한 것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고, 예수는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 청년은 실망하고 떠났다.
둘째 인용문에는 어떤 시각장애인이 등장한다. 〈마가복음〉은 그를 길게 묘사한다. 호 휘오스 티마이우, 바르티마이오스, 튀플로스 프로사이테스(ὁ υἱος Τιμαιου, Βαρτιμαιος, τυφλος προσαιτης). ‘호 휘오스 티마이우’는 ‘티마이오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르티마이오스’의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다. 즉 직역하면 티마이오스의 아들이라는 말이 중복되어 표기되었다.(한글 성서는 그를 ‘디매오’(티매오)라는 라틴어식 발음으로 표기했다.) 그럼에도 흔히 디매오의 아들 이름이 바티매오(바르티매오)라고 오독되곤 했는데, 실은 그의 이름은 익명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 뒤의 표현에서 보듯, 그가 결함이 있는 자여서,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렸다는 것을 시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튀플로스 프로사이테스’다. 튀플로스, 즉 시각장애인인데다, 심지어 프로사이테스, 곧 구걸하는 자이기까지 하다.
〈요한복음〉 9,2에 의하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가 있는”(튀플론 에크 케네테스, τυφλον εκ γενετης) 어떤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여기서는 튀플로스가 거렁뱅이는 아니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도 하늘의 천형이고, 그 자신이든 부모나 조상이든, 누군가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마가복음〉 10장의 튀플로스는 거렁뱅이기까지 하다. 그런 자가 예수를 향해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친다. 사람들은 그런 천벌을 받은 자가 예수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불경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입을 봉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예수가 발길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그는 소원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말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는 예수를 따랐다(에콜류쎄이 아우토, ηκολουθει αυτω).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다. 그가 예수에게 다가간 모습을 50절은 이렇게 묘사한다. ‘제 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에게 다가왔다고. 거렁뱅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다. 그에게 가진 것이 있다면 누더기같은 옷 한 벌뿐이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벗어던지면서까지 예수를 따랐다. 즉 그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것이다. ‘따르다’와 ‘모든 것을 버리다’가 결합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제자됨에 관한 전형이 여기에도 나오고 있다. 하여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자 청년은 거절되었고, 시각장애인인 익명의 거지는 제자가 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어디 내놓을 만한 신분의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좀 유별났다. 해서, 그의 신원도 그랬고 부름의 스토리도 특이해서, 그의 부름 이야기는 베드로 등의 부름 이야기로 가름할 수 없었기에, 따로 그 이야기가 남아 전승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추종자형 제자들은 ‘부름의 말 + 버리고 따름’을 묘사하는 표현들로 묘사되었다. 한데 위의 티매오의 아들 이야기에서, 흔히 간과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하나 있다. 예수는 그에게 ‘가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따랐다.’ 얼핏 보아도 이 두 단어는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다. 그렇다면 해명해야 할 생각거리가 남게 된다. 이 이상한 조합이 함축하고 있는 뒷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라’
‘가다’라는 그리스어 ‘휘파고’(ὑπαγω)의 명령형인 ‘휘파게’(ὑπαγε)는 제2성서에서 24번밖에 사용되지 않은, 비교적 드문 표현이다: 〈마태복음〉 11회, 〈마가복음〉 8회, 〈요한복음〉 4회, 그리고 〈묵시록〉 1회가 전부다. 이 중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마가복음〉에서의 용례다. 〈마가복음〉에서 단어가 사용된 모든 구절들을 모두 인용해면 아래와 같다.
∙ 그때에 예수께서 그(나병환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1,44)
∙ “내가 네(중풍병자)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2,11)
∙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거라사의 광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5,19)
∙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5,34)
∙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시로페니키아 출신 헬라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 예수께서 그(어느 부자 청년)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10,21)
∙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다.(10,52)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이 포착된다. (1)이 단어는 적대자를 지칭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2)이 단어는 추종자형 제자를 지칭하는 데 쓰이지 않았다. 8,33이 예외인데, 여기서 베드로를 가리켜 ‘휘파게’라고 예수가 소리친 것은, ‘너는 내 제자에서 제명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그렇다고 그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적대자가 되지 않았다. 그 내막은 이렇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얘기했다. 그것은 메시아의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즉 예수는 자신이 고난당하다가 죽임당할 것임을 예고하자, 제자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반대했다. 아마도 그건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렇게 예수와 베드로는 노선과 전략을 두고 격하게 논쟁을 벌였던 모양이다. 이에 화가 난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 제자도 아니다. 가거라.” 이때 ‘가거라’는 말은 적대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제자단에서 제명한다는, 일종의 징계의 말이다.
물론 이런 표현이 실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죽임당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이가 이미 기획한 것이라고, 이 부분의 전승 형성자들은 해석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해석한 이들은 예루살렘에 남은 제자들과 다른 지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흔히 ‘수난사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런 수난사적 해석을 담지한, 한때 예루살렘계 공동체 멈버였던 어떤 이가 갈릴래아의 오클로스계 예수공동체를 만나면서,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 이야기, 주로 갈릴래아의 예수 이야기를 채록했다. 그리고 이 예수 이야기집 후반부에 예루살렘계 예수공동체의 수난사 이야기를 덧붙여서 예수전을 완성했다. 즉 그 채록자는 예루살렘 예수공동체의 수난사 해석을 오클로스의 예루살렘에서의 예수 기억들과 결합하여 갈릴래아의 예수 이야기집 후반부에 첨부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가 아니라 실패한 추종자들로 묘사되었다. 진정한 추종자는 예수의 주요 대중이던 오클로스였다. 이것이 이 채록자가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각색한 예수 이야기집인 〈마가복음〉이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말이다.
베드로가 제자단 내부에서 예수와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오클로스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묘사가 복음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원래 예루살렘계 예수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채록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이렇게 해석한 결과일 것이다. 이 채록자는 아마도 예루살렘계 예수공동체에 실망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 아마도 그때부터 이미 제자단에 대해 삐딱한 시각을 가졌을 수 있는 그가 오클로스계 예수파와 만나면서 제자단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화되지 않았을까. 그 결과가 바로 이 설화처럼, 예수와 베드로가 일종의 전략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던 중에 예수가 내뱉었을 것으로 보이는 극단적 발언을 제자단에서의 징계의 말로 재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휘파게’의 용법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겠다. 추종자형 제자도 아니고 적대자도 아닌 이들에게 예수가 ‘가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그들은 예수의 말에 따라 ‘가서’ 자신의 활동의 장에서 예수운동을 계속했다. 이는 예수운동에 참여한 다른 유형의 활동가들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나는 자신의 지역에서 예수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들을 ‘지역협력자’라고 부른 바 있다.
한편 다른 문서들 속에서 ‘휘파게’는 이런 용례로만 쓰인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가라’는 용법이다. 가령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태복음〉 5,41)는 예수의 훈계의 말이나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의 말인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요한복음〉 4,16) 같은 구절이 그렇다. 심지어 〈마태복음〉 4,10에는 휘파게가 사탄을 향한 말로 쓰이기도 했다.(“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즉 위에서 말한 ‘휘파게’의 세 가지 용법은 〈마가복음〉만의 용례다.
지역협력자
예수운동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을 떠돌며 비판적 예언자로서 활동했다. 이때 가버나움은 일종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마가복음〉 1,21; 2,1; 9,33) 아마도 갈릴래아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다 돌아온 가버나움의 숙소는 시몬(베드로)의 장모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예수일행은 떠돌다 들어간 마을에서 집회를 열 때 가끔 집회장소가 누군가의 ‘집’인 경우가 있다. 중풍병자를 고쳤다는 가버나움의 ‘집’(2,1),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이를 찾으러 왔다고 하는 집회 장소인 어떤 이의 집(3,20)처럼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누군가가 예수의 대중집회의 장소로 집을 공여했다. ‘집’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는 제자들은 요한과 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대개 가난한 농민이나 어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니, 그들의 집이 집회 장소로 쓰기엔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집회가 아주 몇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모임이 아니라면 말이다. 추정컨대 집회장소로 제공된 ‘집’은 일반적으로 조금 규모가 있는 집이었겠다. 그렇다면 제자들 외에 누군가는 그 집을 예수일행의 활동을 위해 제공했어야 할 것이다. 도대체 그이는 누구일까.
또 ‘집’들은 예수일행이 떠돌다 묵는 숙소(7,17; 7,24; 9,28; 10,10; 14,3; 14,14)이기도 했다. 이 ‘집’들은 대체로 은거지였을 것이다. 실제로 다음 구절은 ‘집’이 예수일행의 비밀스런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마가복음〉 7,24
이때도 집주인이 명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일행이 공권력을 피해 활동해야 했던 비밀스런 행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운동에 협력했던 지역의 협력자들이 대중집회나 은거지로 집을 제공한 것만은 아니다. 아래에 인용한 구절은 예수일행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떤 것들을 소지하고 있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6,8~9
그들은 지팡이, 전대, 빵, 신발, 옷 두 벌, 그리고 돈도 소지했다. 모두가 소모품이니 어디에선가는 그것을 조달해야 했을 것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떠돌이들이 그것들을 구하려면 누군가의 공여가 있어야 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집을 제공한 이가 이런 소모품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여기서 특기할 것은 ‘화폐’다. 화폐경제가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화폐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장교급 군인(백부장)이거나 상인, 혹은 세관원일 것이다. 예수는 도시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면 세관이 설치된 곳일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세관이 있는 곳을 종종 지나갔다. 한편 예수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제공한 사람, 마지막 거사를 위한 만찬장소를 제공한 사람 등도 그 실명이 공개되지 않은 채 물질적 후원활동을 한 이들이다.
이 사실은 예수운동의 지역협력자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실명이 대부분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역에서 예수운동에 협력하는 것은 대체로 비밀스런 지지활동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한 ‘부자 청년’(〈마가복음〉 10,17~22) 이야기에 나오는 20~21절을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20)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를 따르려면, 즉 추종자형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 청년도 그런 요구에 직면했다. 특히 그는 부자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라고 한다. 한데 그렇게 말하는 구절 바로 앞에, 예수는 그에게 ‘휘파게’ 하라고 한다. 여기서 ‘휘파게’하는 일은 단지 예수일행에게 집과 먹거리, 소모품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른 역할도 요청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모든 재산을 그렇게 한다면 그도 떠돌이 예언자의 자격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하여 그는 소극적 참여자인 지역협력자가 되기로 했다.
여기서 하나 첨언하면, 예수운동에서 지역협력자 유형의 활동가가 바울운동 당대에는 공동체조직로서 역할 변이가 일어난다. 〈고린도전서〉에 등장하는 에클레시아 모임으로 집을 제공한 그리스보(2,1) 같은 이는 실명이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유력한 지도자의 하나였다. 빌립보의 에클레시아 모임을 위해 집을 제공한 ‘루디아 여자’는 비록 실명은 나오지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여성 지도자였다(〈사도행전〉 1612~14).
이것은 예수운동이 비장소성을 특화시키면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장소로부터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이탈한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예수운동의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장소귀속적인 것을 격하하고, 노마드적인 것을 격상하는 담론을 중요시하는 에토스가 발달했던 것이다. 해서 ‘부자 청년’ 이야기처럼, 그가 떠돌이 예언자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절망했다는 표현이 가능했다. 반면 바울 당대에는 떠돌이 예언자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지역의 공동체 조직가가 떠돌이 예언자를 후원할 뿐 아니라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떠돌이 예언자임에도 끊임없이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활동을 벌였던 바울의 사역에서는 불가피한 갈등이었을 것이다. 한편 떠돌이 예언자보다 공동체 조직가의 위상이 압도하던 포스트바울 시대에는 장소성이 그리스도파 신앙의 핵심적 질서의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포스트바울 시대, 장소귀속적 신앙이 빠르게 주도권을 쥐어가던 시절, 〈마가복음〉이라는 노마드적 담론인 예수전이 등장한 것은 그런 추세에 대한 안티테제였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예수’가 처음 소환된 맥락은 바로 그런 것이라는 얘기다. 예수운동의 본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여정에 나선 떠돌이 예언자의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난다는 주장이겠다.
하지만 예수 당대에도 지역협력자들 가운데 비밀스런 후원자의 차원을 넘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리마태아 요셉 등이 그런 이들이다. 그에 대하여는 다른 글에서 좀더 이야기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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