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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 지난 7월29일, 제4회 한반도평화신학포럼 때 발표했던 글. --------------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 모스코바와 맥도널드, 그리고 세계화의 시작과 종말의 징후 2022년 5월16일, ‘로이터통신’ 발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모스코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영업 중인 847개 맥도널드 매장 모두 영업을 중단하고 철수한다는 것이다. 맥드널드가 모스코바에 첫 영업점을 개설한 것이 1990년이니, 32년 만의 철수다. 프랑스의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은 세계화란 미국화에 다름 아니며, 이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함축하는 천박함의 문명을 비꼬면서 ‘맥몽드’(McMonde)라고 비아냉댔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윤만을 .. 더보기
언택트 시대,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가톨릭평론]에 연재하고 있는 '언텍트시대 한국기독교' 5회차 글이다. 이제 하나 남았다. 헤매고 있는 중이어서 지난 여름호에 내 생에 처음으로(?. 내 기억엔 그런데...) 원고를 펑크냈는데, 이번에도 힘들었지만 겨우겨우 넘겼다. [가톨릭평론] 2022년 가을호에 실렸다. 별거 아닌데도 모든 글이 '권리침해'를 받았다고 신고를 해서 4호까지 모두 글을 접속금지 처분당했다. 예측컨대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암튼 그래도 올린다. -----------------------------------------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5) 언택트 시대,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평행이론 1980년대 초 개신교계 진보적 청년운동 기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고 있었다. 그 갈.. 더보기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20여년 전, 당시로선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우리 안의 파시즘]에 글 하나를 실었다. 그 덕에 나는 '내면의 파시즘' 그룹으로 분류되었고, 핫한 계간잡지였던 [당대비평]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나름 할 게 많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작년, 임지현 선생으로부터 우리안의 파시즘 2.0 계획에 저자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조금 겁나서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 했는데, 결국 내가 했다. 그때 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너무 시들시들해진 글쟁이가 된 탓이겠다. 암튼 고육지책으로 완성했다. 책은 제법 반응이 좋다. 나는 시들어가도 독서문화는 아직 생기가 있나보다. 글을 여기에 실을 수는 없어, 첫번째 소절 전문과 이어지는 소절의 제목만 옮긴다. https://www.aladin.co.kr/sho.. 더보기
요한이 잡힌 뒤, 갈릴래아 촌락에서 - ‘일상권력’과의 충돌에 대하여(〈마가복음〉 1,2~3,7) [맘울림] 55.(2021.11)에 실린 글 ------------------------------ 요한이 잡힌 뒤, 갈릴래아 촌락에서 ‘일상권력’과의 충돌에 대하여(〈마가복음〉 1,2~3,7) 가버나움 (14)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이 구절 속에는 예수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그이가 이끄는 집회에 안티파스의 군인들이 난입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하느님나라 운동의 재개를 도모하며 흩어진 추종자의 한 사람이었다. 필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하느님나라운동을 재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때 .. 더보기
‘좁은 문’, 그 문에 이어진 길 위를 걷는 이들 [공동선] 2020.01+02에 실린 글 ----------------------------------------- ‘좁은 문’, 그 문에 이어진 길 위를 걷는 이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마태복음〉 7,13) ‘에이셀싸테 디아 테스 스테네스 퓔레스’(Εισελθατε δια της στενης πυλης). 20여 년 전 헬라어 공부에 매진하던 신학생 시절 외우고 다녔던 문장 중 하나다. ‘스테네스 퓔레스’는 ‘좁은 문’이라는 뜻이고 ‘에이쎌싸테 디아’는 ‘~를 통해서 들어가다’는 뜻이다. 이 문구가 당시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냥 유명한 문구였기에 외워두었던 것이다. 근데 지난 여름, 개인적인 연.. 더보기
촌락 ‘안’과 ‘밖’의 예수운동과 그 주역들 - 라오스와 오클로스 [공동선] 2020년 9+10월호와 11+12월호, 두 회에 나누어서 게재함. 현재 집필 중인 [예수 다시보기]에 게재할 글의 초고임 ----------------------- 촌락 ‘안’과 ‘밖’의 예수운동과 그 주역들 라오스와 오클로스 라오스(λαος)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마가복음〉 7,6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마가복음〉 14,2 이 두 구절에는 ‘백.. 더보기
위험한 믿음 - 이삭 번제물 사건, 다시 읽기 [맘울림] (2021.상반기)에 수록된 글 ---------------- 위험한 믿음 이삭 번제물 사건, 다시 읽기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창세기〉 22,19 그 속에 ‘위험한 믿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너무 늦게 낳은 아들, 그래서 애지중지했던 아들을 신이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창세기〉 22장의 저 유명한 텍스트는 이런 상황을 전제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했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숫양을 보내 아들 살해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지 않게 했다고 함으로써 신의 짓궂은 장난은 사면을 받는다. 또 신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의 신실함에 신이 축복을 재확인해주었다고 함으로써 아들을 죽일뻔했던 아브.. 더보기
‘실로 프로젝트’는 왜 좌초했을까 더보기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에 기대어 ‘오늘의 사릌스가 누구인지’를 묻다 [공동선] 2021년 3+4월호에 실린 글 강의 요청이 있어 적합한 자료를 찾다가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요즘 내가 얼마나 헤매고 있는지 여실히 보이는 글이었다. 무엇보다도 교정이 제대로 안 된 글이었다. 이걸 원고라고 보내다니. 창피하다. 게다가 같은 글을 두 번이나 여기에 올렸다. 그것을 지우고, 이 글을 다시 다듬어서 올린다. -------------------------------------- 새해 길목에서 문뜩 ‘오늘의 사릌스’를 묻다 안병무의 〈요한복음〉 해석에 기대어서 ‘호 로고스 사릌스 에케네토 ...’.( ὁ Λογος σαρξ εγενετο ...) 안병무 선생이 한신대학교 교수이던 시절, 수유리 캠퍼스의 도서관 현관 입구에 새겨진 문구다. ‘호 로고스’(ὁ Λογος) 말씀이, ‘.. 더보기
‘동성애 반대’인가 ‘폭력적 성에 대한 반대’인가 [맘울림] (2021년 2월)에 실린 글. [성서와 동성애]에서 동성애 반대처럼 보이는 구절 세 개를 다루었는데,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하나는 로마서와 별 차이 없을 것이라고 보아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니 특별히 검토할 필요가 있네요. 해서 책을 보충한다는 쓴 것을 공개합니다. 혹 책이 재판을 찍을 수 있다면, 그리고 증보판으로 찍을 수 있다면 수록하겠지만, 기약할 수 없기에 글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글을 마무리할 때쯤 마침 [맘울림]에서 원고를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이것을 드렸고, 책이 발간된 이후 공개합니다. 아무튼 [성서와 동성애]에서 다룬 세 개의 성서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린도전서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서 속에는 동성애 반대는 없습니다. 각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