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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의 임마누엘을 찾아서 [공동선] 2022년 11+12월호에 게재된 글. 2012년부터 만 10년간 거의 빠짐없이 매호마다 글을 게재했는데, 이 글로 [공동선]과의 쓸쓰기 인연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제 글쓰기를 가능한 한 자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매후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아서 힘들기도 했지만, 그 동안 행복했다. 더 멋진 잡지로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 오늘의 임마누엘을 찾아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7,14 ‘알마’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 중 이 구절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필시 〈마태복음〉 1,23 “보아라, 동.. 더보기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6) - 언택트 시대 계급적 경계짓기, 성공의 위기 [가톨릭평론] (2022.가을호)에 실린 글. '언택트시대 한국개신교'라는 주제로 연재된 마지막 글. ----------------------- 언택트 시대 계급적 경계짓기, 성공의 위기 2021년 봄호부터 시작된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는 이번 글을 끝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애초에는 4회로 기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언급하지도 못한 채 마감하기가 못내 아쉬워하던 차에 편집진이 먼저 제안해 준 덕에 두 번을 더 쓰기로 했다. 물론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만일 조금 더 쓰겠다고 하면 관대한 편집진은 내게 더 기회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한데 연재 도중에 불쑥 찾아온 마음의 질환이 나의 정신의 집중력을 한껏 흩뜨려버렸다. 두 번이나 약속된 원고를 ‘펑크’내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제는 마음.. 더보기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 평등한 포용주의에 관한 성서의 상상력 며칠 전, 아마도 개신교계의 밴댕이 아무개들이 나의 글에 대한 권리침해 신고를 또 했다. 몇번째인지 헤아리기도 귀찮을 정도다. [경향신문](2019 10 05)에 실렸던 컬럼 가 그 글이다. 오래된 것이고 실패한 칼럼이어서 굳이 페북이나 다른 sns 공간에 공개할 것까지는 못 되지만, 내용은 사법개혁에 대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그것을 반대하는 이른바 '반조국연대'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 특히 여기에 한몫하고 있던 한기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글이다. 한데 문재인 정부는 사법개혁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배신했다. 집권 말기에 가서야 누더기 같은 사법개혁을 했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집권 기간 내내 인권 친화적인 개혁입법을 거의 하지 않았고, 몇 안 되는 개혁도 실제적으로 진척시키지 않았으.. 더보기
떠돌이 예언자와 지역협력자 - 예수운동 활동가의 두 범주 [공동선] 2022 07+08에 실린 글 ------------------------------------ 떠돌이 예언자와 지역협력자 예수운동 활동가의 두 범주 “내 뒤를 따르라” + “버리고 따랐다” 예수는 어떤 이를 제자로 부를 때 ‘듀테 오피소 무’(Δευτε οπισω μοη) 혹은 ‘아콜류쎄이 모이’(Ακολουθει μοι)라고 말했다.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나를 따르라’라는 뜻이다. 이 부름을 받은 이는 놀랍게도 자신의 것을 ‘버리고 따랐다’(아피에미 카이 아콜류쎄오, αφιημι και ακολουθεω)고 한다. 낯선 이가 와서 다짜고짜 자기를 따르라고 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랐다는 말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하나의 해답은 그들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더보기
예수의 제자들, 그들과 그녀들 [공동선] 2022. 03+04와 05+06에 나누어 실린 글 ------------------------------------------------------------------- 예수의 제자들, 그들과 그녀들 ‘장소’와 예수운동 대중활동 주요 거점(장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예수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그 특징을 이해하는 데 퍽 유용하다. 첫 번째 주요 거점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했던 베레아(Perea) 지방의 요르단강 인근 지역이었고, 요한이 당국에 체포된 이후 갈릴래아의 마을회당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마을회당에서 바리사이와 회복할 수 없는 갈등 상황에 직면하게 된 이후 예수 일행은 갈릴래아의 호숫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벌이다 최후를.. 더보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 지난 7월29일, 제4회 한반도평화신학포럼 때 발표했던 글. --------------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포스트세계화 시대 민중신학의 평화 담론 모스코바와 맥도널드, 그리고 세계화의 시작과 종말의 징후 2022년 5월16일, ‘로이터통신’ 발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모스코바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영업 중인 847개 맥도널드 매장 모두 영업을 중단하고 철수한다는 것이다. 맥드널드가 모스코바에 첫 영업점을 개설한 것이 1990년이니, 32년 만의 철수다. 프랑스의 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은 세계화란 미국화에 다름 아니며, 이 미국적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함축하는 천박함의 문명을 비꼬면서 ‘맥몽드’(McMonde)라고 비아냉댔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윤만을 .. 더보기
언택트 시대,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가톨릭평론]에 연재하고 있는 '언텍트시대 한국기독교' 5회차 글이다. 이제 하나 남았다. 헤매고 있는 중이어서 지난 여름호에 내 생에 처음으로(?. 내 기억엔 그런데...) 원고를 펑크냈는데, 이번에도 힘들었지만 겨우겨우 넘겼다. [가톨릭평론] 2022년 가을호에 실렸다. 별거 아닌데도 모든 글이 '권리침해'를 받았다고 신고를 해서 4호까지 모두 글을 접속금지 처분당했다. 예측컨대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암튼 그래도 올린다. ----------------------------------------- 언택트 시대 한국개신교(5) 언택트 시대, 교회 밖으로 나간 미디어전사들 평행이론 1980년대 초 개신교계 진보적 청년운동 기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고 있었다. 그 갈.. 더보기
한국의 작은 독재자들 - 정치종교와 문화종교 개념으로 살펴보는 퇴행적 대중의 출현 20여년 전, 당시로선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우리 안의 파시즘]에 글 하나를 실었다. 그 덕에 나는 '내면의 파시즘' 그룹으로 분류되었고, 핫한 계간잡지였던 [당대비평]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나름 할 게 많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작년, 임지현 선생으로부터 우리안의 파시즘 2.0 계획에 저자로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조금 겁나서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 했는데, 결국 내가 했다. 그때 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너무 시들시들해진 글쟁이가 된 탓이겠다. 암튼 고육지책으로 완성했다. 책은 제법 반응이 좋다. 나는 시들어가도 독서문화는 아직 생기가 있나보다. 글을 여기에 실을 수는 없어, 첫번째 소절 전문과 이어지는 소절의 제목만 옮긴다. https://www.aladin.co.kr/sho.. 더보기
요한이 잡힌 뒤, 갈릴래아 촌락에서 - ‘일상권력’과의 충돌에 대하여(〈마가복음〉 1,2~3,7) [맘울림] 55.(2021.11)에 실린 글 ------------------------------ 요한이 잡힌 뒤, 갈릴래아 촌락에서 ‘일상권력’과의 충돌에 대하여(〈마가복음〉 1,2~3,7) 가버나움 (14)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이 구절 속에는 예수에 대한 대중의 기억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는 그이가 이끄는 집회에 안티파스의 군인들이 난입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하느님나라 운동의 재개를 도모하며 흩어진 추종자의 한 사람이었다. 필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하느님나라운동을 재개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때 .. 더보기
‘좁은 문’, 그 문에 이어진 길 위를 걷는 이들 [공동선] 2020.01+02에 실린 글 ----------------------------------------- ‘좁은 문’, 그 문에 이어진 길 위를 걷는 이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마태복음〉 7,13) ‘에이셀싸테 디아 테스 스테네스 퓔레스’(Εισελθατε δια της στενης πυλης). 20여 년 전 헬라어 공부에 매진하던 신학생 시절 외우고 다녔던 문장 중 하나다. ‘스테네스 퓔레스’는 ‘좁은 문’이라는 뜻이고 ‘에이쎌싸테 디아’는 ‘~를 통해서 들어가다’는 뜻이다. 이 문구가 당시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냥 유명한 문구였기에 외워두었던 것이다. 근데 지난 여름, 개인적인 연.. 더보기